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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신탁 의식의 날이 밝았다. 새벽부터 청호 공작가의 저택은 분주했다. 시비들이 이도현의 예복을 매만졌고, 집사는 마차의 채비를 서둘렀다. 왕국의 주요 귀족 가문이 모두 참석하는 국가 행사였기에, 옷차림 하나에도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오늘은 웬만하면 말을 아끼거라." 이강섭이 마차에 오르며 말했다. "예." 이도현이 짧게 답했다. 마차가 왕궁을 향해 달리는 동안, 이도현은 창밖을 바라보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릴 적 아버지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신전에서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그곳은 인간의 힘이 통하지 않는 곳이니까.' 그때는 그저 격식을 갖추라는 뜻으로 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말이 왜인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왕궁의 대신전은 이른 아침부터 인파로 가득 찼다. 각 가문의 문장을 새긴 마차들이 줄지어 들어섰고, 시종들이 저마다의 주인을 안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신전 앞뜰에는 향내가 짙게 감돌았고, 사람들의 낮은 말소리가 웅웅거리며 뒤섞였다. 청호 공작가의 자리는 앞쪽 열에 마련되어 있었다. 왕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라는 증거였다. 이강섭과 이도현, 그리고 채린이 나란히 앉았다. 채린은 자리에 앉으며 슬쩍 이도현의 옆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이 가문에서 함께 자란 사이였고, 이도현의 표정 변화를 누구보다 빨리 읽어내는 사람이었다. "긴장하지 마라." 이강섭이 낮게 말했다. "긴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도현이 답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왕궁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목덜미가 서늘했고, 이따금 등줄기를 타고 알 수 없는 떨림이 지나갔다. 그는 그것을 단순한 예민함으로 치부하려 했다. '별일 아닐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다독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 제단 앞에는 대신전의 사제들이 늘어서 있었다. 흰 예복을 입은 사제들의 수만 해도 수십 명에 달했고, 그 중심에 상급 사제가 서 있었다. 그는 신전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지닌 자로, 국왕조차 예를 갖추어 대하는 인물이었다. 국왕이 옥좌에 앉아 의식의 시작을 알렸다. "올해의 신탁 의식을 시작한다." 국왕의 목소리가 신전 안에 울렸다. 목소리에는 위엄이 실려 있었지만, 동시에 매년 반복되는 절차에 대한 익숙함도 배어 있었다. 이 의식은 이미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관례였다. 그저 신물에게 나라의 안녕을 묻는, 상징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사제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다. 낮은 성가가 신전 안을 채웠다. 성가는 물결처럼 낮게 퍼지며 사람들의 숨소리마저 삼켜버렸다. 이도현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매년 열리는 형식적인 행사라 들었기 때문이었다. 앞줄에 앉은 다른 가문의 자제들도 지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옆에 앉은 이강섭의 표정은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평소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의 미세한 변화였지만, 이도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가 긴장하고 있다.' 이도현은 그것을 눈치챘지만, 이유를 물을 틈이 없었다. 성가가 절정에 이르렀을 즈음, 제단 중앙의 신물이 서서히 빛을 뿜기 시작했다. 매년 반복되는 절차였다. 신물이 빛을 내는 순간, 그 빛의 색으로 그해의 국운을 점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그 빛깔이 이상했다. 평소의 은백색이 아니라, 옅은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신전 안의 몇몇 사제들이 그 변화를 눈치채고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번져나갔다. 이런 색은 지난 수십 년의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상급 사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가 손에 쥔 지팡이를 움켜잡는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시작되었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들은 사람은 몇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말 속에 담긴 무게는 신전 앞줄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 빛이 점점 강해졌다. 신전 안의 대기가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촛불이 일제히 흔들렸고, 몇몇 사람들이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신전의 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조차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이도현도 그 변화를 감지했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이건 예정된 절차가 아니다.'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의 확신을 뒷받침하듯, 사제들의 성가가 하나둘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훈련받은 사제들조차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제단 위, 붉은 빛의 중심에서 무언가가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스르릉- 공기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신전 전체에 울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쏠렸다. 숨을 죽인 채,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형체는 점차 뚜렷해졌다. 온몸을 감싼 새하얀 후드를 쓴 존재였다. 얼굴은 후드 안쪽 깊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키는 성인 남성보다 조금 큰 정도였지만, 그 존재가 뿜어내는 기운은 신전 전체를 압도할 만큼 무거웠다. "저것은..." 국왕이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목소리에 동요가 섞여 있었다. 옥좌 주변을 지키던 근위대조차 무기를 쥔 손을 떨었다. 그들 역시 이런 존재를 마주한 적이 없었다. 상급 사제가 무릎을 꿇으며 낮게 외쳤다. "운명의 사도시여." 신전 안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무거운 침묵이었다. 심지어 어린아이를 데려온 하급 귀족들조차, 아이의 입을 막으며 몸을 낮췄다. +++ 하얀 후드의 존재가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정확한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 시선의 방향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가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 시선은 청호 공작가의 자리를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이도현을 향해. 이도현은 순간 온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고는 이상하게도 느려졌다. '왜 나를...'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존재의 시선이 더 깊게 그를 짓눌렀다. 주변 귀족들의 시선도 하나둘 이도현에게 옮겨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만은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몇몇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낮게 수군거렸고, 몇몇은 그저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채린이 옆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도현의 옷깃을 붙잡았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그럼에도 눈을 돌리지 않고 이도현을 지켜보았다. 이강섭의 얼굴에서도 처음으로 명백한 긴장이 드러났다. 평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그의 표정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것처럼 보였다. 하얀 후드의 존재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끝이 정확히 이도현을 가리켰다. 신전 안의 촛불이 일제히 꺼졌다. 퍽- 작은 소리와 함께 불씨들이 동시에 사그라들었다. 그 짧은 소음이 오히려 정적을 더 깊게 만들었다. 순간의 어둠 속에서, 존재의 목소리가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여러 겹으로 겹쳐 들리는 이질적인 음성이었다. 마치 수십 명이 동시에 같은 말을 속삭이는 듯한, 소름 끼치는 울림이었다. "오랫동안... 뒤틀려 온 흐름이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이도현에게 쏠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정적이 신전을 감쌌다. 누군가는 눈을 질끈 감았고, 누군가는 옆 사람의 손을 붙잡았다. 이도현은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도,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이 스스로의 것이 아닌 것처럼 굳어 있었다. 하얀 후드의 존재가 한 걸음, 그를 향해 다가섰다. 그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존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감각만이 신전 전체를 짓눌렀다. 그리고 그 순간, 신전 전체를 짓누를 다음 말이 이어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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