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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해가 저물었다. 청호 공작가의 저녁 식탁엔 은식기 부딪는 소리만 낮게 울렸다. 촛불 여섯 개가 은촛대 위에서 흔들렸고, 그 흔들림마다 그림자가 벽을 타고 늘어졌다. 시종들은 벽을 따라 늘어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도현은 열다섯이었다. 청호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였고, 식탁 상석엔 아버지 이강섭 공작이 앉아 있었다. "오늘 검술 교관이 다녀갔다고 들었다." 이강섭이 말을 꺼냈다. "예." 이도현의 대답은 짧았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부자 사이엔 늘 이런 식의 짧은 문답만 오갔다. 이강섭은 국경의 전황을 보고받고, 조정의 암투를 조율하고, 상단의 이문을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아들과 마주 앉는 시간은 그 하루 중 가장 짧고 가장 낯선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어려워하시는군.' 이도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수프를 떠먹었다. 실은 반대였다. 이강섭이 어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도현이 다가서는 법을 몰랐다. 그것을 이도현 본인은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아버지의 무뚝뚝함을 자신에 대한 거리감으로 받아들였고, 그 거리감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지 오래였다. 식탁 맞은편엔 유채린이 앉아 있었다. 설란 공작가의 딸이었고, 이도현의 혼약자였다. 채린은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이어갔다. 시선을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수프 스푼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손이었다. '저 아이는 늘 저렇게 조용하지.' 이도현은 그런 채린을 곁눈질하며 별생각 없이 넘겼다. 그에겐 채린의 침묵이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상하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 혼약자란 원래 이런 존재라고 생각했다. 조용하고, 순종적이고, 눈을 마주치지 않는 존재. 그것이 당연하다고 배운 적도 없었지만, 의심해본 적도 없었다. 시종 하나가 새 잔을 놓다가 손끝이 살짝 떨렸다. 이도현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식사가 끝나자 채린은 짧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발걸음이 유난히 조심스러웠지만, 아무도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 방으로 돌아온 이도현의 곁엔 종자 소이가 있었다. 소이는 늘 그렇듯 벽에 붙어 선 채 시선을 낮추고 있었다. 열여섯이라고 했던가. 이도현보다 한 살 위였지만, 신분 앞에서 나이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물을 가져와." 이도현이 짧게 명했다. "네, 도련님." 소이의 목소리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이도현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에게는 그저 익숙한 하인의 태도였을 뿐이었다. 소이가 물그릇을 내려놓을 때, 그릇 가장자리가 탁자에 부딪혀 작게 소리를 냈다. 소이는 순간 어깨를 움츠렸다. 마치 매질을 예상하는 사람처럼. 이도현은 그 반응조차 그저 스쳐 지나갔다. 소이가 방을 나가고 나서야 방 안엔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도현은 책상 앞에 앉아 오늘 배운 검술의 요결을 떠올려보았다. 교관이 강조했던 자세, 힘을 빼는 순간, 그 순간에 실리는 무게. 하지만 머릿속은 자꾸만 겉돌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갈증 같은 것이 가슴 한켠에 자리했다. 밤이 깊었다. 이도현은 침상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부족하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 같은 감정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부와 권력은 이미 손 안에 있었다. 아버지의 후계자였고, 혼약자가 있었고, 자신을 시중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무언가 텅 빈 느낌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그것을 그저 사춘기의 감상 정도로 여기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오늘 낮 교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힘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쓰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교관이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는 그 말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 잠이 깊어졌을 때, 벼락이 떨어졌다. 머릿속으로. 쿵- 이도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숨이 턱 막혔다. 낯선 기억들이 밀려들었다. 낯설지만, 동시에 자신의 것이었다.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물러가고, 다시 밀려왔다. 한 인간의 생애 전체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감각이었다. 다른 세계의 삶이었다.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다가 죽은 어느 남자의 삶. 야근이 잦았고, 퇴근길 지하철에서 웹소설을 읽던 삶. 별다를 것 없는, 그래서 더 선명하게 기억나는 삶이었다. 그리고 그 삶의 끝에서 읽었던 소설. 주인공 한도경이 등장하는, 그가 몰락시키던 악역 이도현의 이야기. '내가... 그 이도현이라고?' 이도현은 이불을 움켜쥔 채 몸을 떨었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등줄기를 타고, 멈추지 않았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듯 뛰었고, 숨을 쉬어도 공기가 목에 걸린 것처럼 답답했다. 소설 속에서 이도현은 학대와 폭력을 일상처럼 저지르는 인물이었다. 혼약자를 학대하고, 하인을 매질하며, 결국 한도경의 손에 단죄받아 파멸하는 조연. 소설 속 문장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이도현은 유채린의 뺨을 후려쳤다.' '소이의 등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활자로 읽었을 땐 그저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자극일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파멸의 시작점이 바로 자신의 삶이었다. 이도현은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럼 채린의 그 표정은...' 기억이 하나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채린이 늘 고개를 숙였던 이유. 소이의 손이 떨렸던 이유. 시종이 잔을 놓다가 손끝을 굳혔던 이유. 그 모든 것들이 이제야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었다. 그것들이 전부, 자신이 저질러온 짓들의 결과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밀려왔다. 소설 속 이도현이 저지른 짓들을, 이 몸의 주인이 실제로 저질러왔다는 사실. 몰랐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았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고, 사람들의 두려움이 기억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도현은 그 빛을 바라보며 오래 앉아 있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몇 번이나 다시 눈을 감아보았지만, 눈을 감을 때마다 소설 속 장면들이 재생되었다. 채린의 비명, 소이의 신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웃었다는 이도현의 표정. '이건 내가 아니다.' 그렇게 되뇌어보았지만, 몸은 분명 이도현의 것이었다. 기억도, 손도, 목소리도, 전부. +++ 아침이 밝았다. 하지만 이도현에게는 어제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그는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열다섯 소년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제 다른 사람의 기억이 들어차 있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매일 보던 얼굴인데도, 오늘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소설의 세세한 장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채린을 향한 매질, 소이를 향한 폭언, 그 밖의 수많은 하인들을 향한 무자비한 처사들. 매질을 가하며 짓던 표정, 사죄를 구하는 목소리를 무시하던 태도, 그 모든 것이 낱낱이 떠올랐다. 전생의 자신은 그런 소설을 그저 오락으로 읽었을 뿐이었다. 이도현이라는 캐릭터의 악행에 분노하고, 그가 파멸하는 장면에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뿐이었다. 댓글창에서 사람들이 이도현을 욕하는 것을 보며 함께 욕했던 기억도 났다. '이 새끼 죽어야 한다'는 댓글에 공감을 눌렀던 기억도. 그런데 이제 자신이 바로 그 캐릭터였다. 거울 속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이도현은 그대로 손을 내렸다. 만져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얼굴은 이미 정해진 얼굴이었고, 이 손은 이미 정해진 짓을 저지른 손이었다. "도련님, 아침 채비를..." 소이가 문을 두드리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이도현은 순간 몸이 굳었다. 소이의 목소리에 담긴 두려움이 이제야 선명하게 들렸다. 어제까지는 그저 하인의 조심스러운 어조라고 여겼던 것이, 오늘은 다르게 들렸다. 매질을 예상하는 자의 목소리였다. '저 아이가 나를 얼마나 무서워했을까.' 그 생각에 목이 메었다. 문을 열고 나온 소이는 여전히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었다. 어깨는 살짝 움츠려 있었고, 두 손은 앞으로 모아 쥔 채였다. 언제든 명령을 받을 준비를, 혹은 언제든 벌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자세였다. 이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이 상황을 되돌릴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사과를 하면 소이가 더 두려워할지도 몰랐다. 갑자기 달라진 태도가 오히려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되뇌며 옷을 걸쳤다. 하지만 결심은 결심일 뿐, 지금의 이도현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소설 속에서 이 몸의 주인은 결국 한도경의 손에 파멸했다. 그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의 결심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방문을 나서던 이도현의 발이 문턱에서 잠시 멈췄다. 복도 저편, 채린이 지나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이도현은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소설의 결말이 어디쯤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떠올렸다. 몰락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 시작점은 바로 오늘 이 아침이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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