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감시자가 흑성령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으니까.
애초에 이곳으로 쫓겨나듯 내려올 때부터 알고 있었다. 왕궁에서 나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다는 걸.
성녀 자리를 뺏기고, 변경으로 밀려난 여자. 그런 여자를 그냥 잊어줄 만큼 서지아는 관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감시자가 온다는 소식은, 오히려 늦게 왔다고 해야 맞았다.
"성에서 일할 시녀를 보내주셨습니다." 박도경이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왕궁에서 직접 파견한 인력이라고 합니다."
서류를 받아 든 손끝이 살짝 무거웠다. 종이 한 장이 뭐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지.
"왕궁에서요?" 나는 서류를 넘겨보며 되물었다. "여기까지 자원해서요?"
박도경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도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왕도에서 파견한 시녀가 변경지까지 제 발로 온다는 게 이상하지 않을 리 없었다. 흑성령이 어디 놀러 오는 곳도 아니고.
"이름이 뭐죠?" 나는 물었다.
"유선이라고 합니다." 박도경이 대답했다.
유선.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왕도에서 왔다면, 그것도 이렇게 자원해서 왔다면, 나를 감시하러 온 게 분명했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는 결론이었다.
"만나볼게요." 나는 말했다. 어차피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얼른 얼굴이라도 봐두는 게 나았다.
유선은 젊은 여자였다. 예의 바르고, 조심스럽고, 지나치게 완벽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인사하는 각도까지 계산된 것처럼 딱 맞았다.
완벽함이 오히려 의심을 사는 순간도 있는 법이었다. 이 정도로 흠 없는 사람이라면, 흠을 완벽하게 숨기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성녀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성녀님이라니. 그 호칭부터 이상했다. 나는 이제 성녀가 아니었다. 그 자리는 이미 서지아의 것이 되었고, 나는 그저 흑성령의 안주인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그 호칭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었다.
일부러일까. 아니면 진짜로 모르는 척을 하는 걸까.
"전 성녀예요." 나는 정정했다. "그리고 여기선 그냥 부인이라고 불러도 돼요."
유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만은 나를 놓치지 않고 관찰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인사를 하면서도, 방 안 구석구석을 훑는 듯한 시선. 내가 어디에 뭘 두는지,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전부 눈에 새겨 넣으려는 듯한 태도였다.
뭐, 어쩌겠어. 왕도에서 보낸 사람이 그 정도 눈치도 없으면 서지아가 실망하겠지.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한이헌은 그날 밤 나를 불러 조용히 말했다.
집무실의 등불이 낮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저 시녀, 서지아가 보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지아가.
왕자가 아니라 지아가 직접 사람을 보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강민재였다면 오히려 예상 범위 안이었다. 왕자로서 견제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아가 직접 나섰다는 건, 이게 왕실의 공식적인 견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개인적인 것. 지아 혼자만의 계획.
"확실한가요?" 나는 물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차분하게 나와서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편지 하나를 가로챘습니다." 그가 종이 한 장을 건넸다.
편지를 받아 드는 손끝에 종이의 결이 느껴졌다. 접힌 자국이 여러 번 펴고 접은 흔적처럼 낡아 있었다.
편지에는 익숙한 필체가 적혀 있었다. 지아의 것이었다.
동그랗고 단정한 글씨. 어릴 때부터 봐온 그 글씨체가, 지금은 이렇게 나를 옥죄는 도구가 되어 있었다.
'언니가 성마법을 썼다는 소식은 예상보다 빠르다. 계획을 서둘러야 한다. 오라버니에게는 알리지 말 것.'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읽을수록 이상한 문장이었다.
계획. 오라버니에게는 알리지 말 것.
지아가 강민재와 다른 계획을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성녀 자리를 노린 게 전부가 아니었던 걸까.
머릿속에서 온갖 가능성이 뒤섞였다. 지아가 원했던 게 정말 성녀 자리뿐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대체 뭘 노리고 있는 걸까.
"이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한이헌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등불 아래서 그의 눈빛이 유난히 짙어 보였다.
"당신 동생이, 왕자의 계획과는 다른 무언가를 따로 진행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그가 말했다. "당신을 이용해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지아가 나를 밀어낸 건 강민재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뒤에 다른 게 있다면, 처음부터 나는 지아를 완전히 잘못 읽고 있었던 셈이었다.
"당신을 이용해서, 라니." 나는 편지를 다시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그건 저도 아직 모릅니다." 한이헌이 고개를 저었다. "다만 성마법을 언급했다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당신이 성마법을 썼다는 소식이, 지아의 계획에 어떤 영향을 준 게 분명하니까요."
"조심해야 합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저 시녀도, 앞으로 흑성령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왕도로 보고할 겁니다."
"알아요." 나는 편지를 다시 접어 그에게 건넸다. "그럼 앞으로는 좀 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겠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벌써 몇 가지 계산이 스치고 있었다. 유선 앞에서 뭘 감추고, 뭘 흘려도 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저 여자가 서지아에게 안심하고 보고할지.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 계산은 기본이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처음으로 어떤 신뢰 비슷한 것이 섞여 있었다.
"당신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이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군요."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나는 대답했다. "그냥 살아남으려는 거예요."
그 말을 하면서, 나는 스스로도 조금 웃겼다. 살아남으려는 거라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성녀로서 온갖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내가, 지금은 변경지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게.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창밖으로 흑성령의 어두운 벌판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창틀을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밤공기는 차가웠고, 별빛은 흐릿했다.
지아의 편지 속 한 문장이 계속 머릿속을 떠돌았다. 계획을 서둘러야 한다.
대체 무슨 계획을. 그리고 그 계획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나를 밀어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면, 그다음엔 뭐가 남아 있는 걸까. 강민재의 사랑도, 성녀 자리도 아닌 다른 무언가가.
머릿속으로 몇 가지 답을 떠올려봤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답을 알 수 없는 채로, 밤은 조용히 깊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용함 속에서, 유선의 방 창문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저렇게 늦은 시간까지 무슨 보고서를 쓰고 있는 걸까.
나는 그 불빛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커튼을 천천히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