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흑성령으로 발령이 떨어진 날,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이 정도로 늦게 결정이 난 게 의아할 지경이었다. 한설 공작가의 다섯째 아들. 서자. 적통 형제들 사이에 끼어 있는 이름 하나. 나는 애초에 이 집안에서 셈에 들어가지 않는 존재였다.
"한이헌." 아버지, 한설 공작은 서류를 내 앞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흑성령의 영주로 가라."
서류를 눈으로 훑었다. 인장은 이미 찍혀 있었다. 내 의견을 물으려는 자리가 아니었다. 통보였다.
"명 받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버지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가 다시 펴졌다. 반발이라도 기대했던 걸까. 무릎을 꿇고 애원하거나, 혹은 억울함을 토로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던 걸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애원해서 달라질 결정이 아니었고, 애원할 만큼 이 집안에 미련도 없었다.
한설 공작가에는 아들이 다섯이었다.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정실부인의 자식이었고, 나만이 유일한 서자였다. 어릴 적부터 나는 식탁의 끝자리에 앉았고, 가문의 행사에서는 이름조차 불리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내가 태어난 방식이 그런 것이었으니까.
흑성령은 몬스터가 들끓고 지원이 끊긴 지 오래인 죽음의 땅이었다. 왕국 북단, 지도에서도 회색으로 칠해진 곳. 그곳을 다스리던 영주들은 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거나 도망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곳이었고, 그러니 가장 대체 가능한 아들이 가는 게 당연했다.
나는 그 논리에 이의가 없었다.
"실망시키지 마라."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다.
실망이라는 감정을 느끼려면 먼저 기대가 있어야 하는데, 아버지에게 나는 기대할 대상조차 아니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저 말은 그저 형식이었다. 서자를 죽음의 땅으로 보내면서도 최소한의 체면을 챙기려는, 딱 그만큼의 말.
상관없었다. 나는 그 땅을 지켜낼 자신이 있었다.
검을 쥐는 법은 스스로 익혔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정실 형제들에게는 각자의 검술 사범이 붙었지만, 나에게는 그런 사치가 없었다. 대신 나는 실전에서 배웠다. 열여섯에 처음 전장에 끌려 나갔고, 그 이후로 흑성령보다 더 험한 전장에서도 살아남은 경험이 있었다. 죽은 자들의 몸에서 검법을 훔쳐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만이 아니라 그 땅에 딸려 온 사람들까지 지켜야 했다.
서지율.
왕도에서 내려온 서신에는 그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전 성녀, 누명을 쓰고 사형 대신 유배와 혼인을 명받은 여자. 성녀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온 사연이야 왕도의 소문을 통해 대략 알고 있었다. 신탁을 조작했다는 죄목. 진위야 알 수 없었지만, 결과는 명확했다. 목이 붙어 있는 대신 흑성령으로 보내진다는 것.
정략혼이라는 말도 우스웠다. 나에게 남는 게 있다면 그저 죽음의 땅에 딸려 오는 여자 하나였고, 그녀에게 남는 게 있다면 얼어 죽지 않을 확률 정도였다. 이득이라 부르기엔 서로 너무 초라한 거래였다.
그녀가 도착하는 날, 나는 성문 앞에 서 있었다. 바람이 매서웠다. 흑성령의 겨울은 왕도보다 두 달은 먼저 시작됐다.
마차가 멈추고, 여자가 내렸다. 생각보다 작았다. 왕도의 화려한 옷을 입고도 어딘가 지친 얼굴이었다. 며칠간의 여정이 몸에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눈빛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죄인의 눈빛이라기엔 너무 곧았다.
나는 그 점이 이상했다. 사형을 겨우 면한 사람이라면 두려움이든 원망이든 얼굴에 남아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한이헌입니다." 나는 짧게 이름만 밝혔다.
"서지율입니다." 그녀도 짧게 답했다. 목소리에 두려움은 없었다.
예상과 달랐다.
왕도에서 쫓겨난 여자라면 겁에 질리거나, 혹은 원망 가득한 얼굴이어야 할 텐데. 그녀는 그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성벽의 균열,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낡은 갑옷, 그 뒤로 보이는 황량한 벌판까지. 마치 이 땅을 가늠하는 사람처럼.
"여기가 흑성령이군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춥네요."
"곧 더 추워질 겁니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
그녀가 나를 잠깐 쳐다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예상치 못한 웃음이었다.
"위로는 필요 없어요. 사실만 알려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게 훨씬 도움이 되니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사형을 면했다는 것만으로 안도할 상황이 아닌데, 그녀는 이 땅을 살아갈 방법을 묻고 있었다. 두려움을 감추는 것과, 두려움 자체가 없는 것은 얼굴만 봐서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나는 후자에 무게를 두기로 했다. 아직은 판단을 미루는 게 맞았다.
죄인치고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앞장서 걸었다.
영주성은 낡았고, 성벽 곳곳이 무너져 있었다. 정문을 지나 내성으로 이어지는 계단에는 이끼가 껴 있었고, 창문 몇 개는 판자로 막혀 있었다. 지원이 끊긴 지 오래인 땅의 성이 어떤 모습인지, 그녀는 곧 알게 될 것이었다.
그녀는 그 모든 걸 눈으로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실망한 기색은 없었다. 그저 파악하려는 눈빛이었다. 걸음을 옮기며 계단의 개수를 세는 것처럼도 보였다.
"혼인은 언제 치르나요?" 그녀가 물었다.
"형식적으로는 오늘 밤." 나는 대답했다. "실질적인 부부 관계를 요구하진 않겠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그녀가 곧바로 대답했다. "저도 그럴 마음 없었거든요."
너무 솔직한 대답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대개 이런 자리에서는 최소한의 체면치레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녀에게는 그런 절차가 필요 없어 보였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편했다.
"짐은 이쪽으로 옮기겠습니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성 안에 쓸 만한 방이 많지 않아서, 조금 불편하실 겁니다."
"불편함이야 왕도에 있을 때도 겪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감옥보다 나으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감옥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것도 이상했다. 이 여자는 자신이 겪은 일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숨길 게 없어서인지,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 여겨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박도경이 성문 쪽에서 급하게 뛰어오는 게 보인 건 그때였다.
"영주님!" 그가 소리쳤다.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북쪽 경계에서 마물 무리가 감지됐습니다. 규모가 큽니다!"
그 말에 나는 즉시 검을 챙겼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흑성령에서는 늘 이런 식이었다. 도착 첫날부터 평온한 적이 없었다.
서지율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두려움 대신 궁금함이 담겨 있었다.
"저도 가도 될까요?" 그녀가 물었다.
그 물음에 나는 잠깐 멈춰 그녀를 다시 보았다. 방금 도착한 여자가, 마물 무리가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겁에 질리기는커녕 따라가겠다고 나서다니. 흔한 반응이 아니었다.
"위험합니다." 나는 단호히 말했다. "성 안에 있으십시오."
"명령이신가요?" 그녀가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그녀가 뭐라 대답했는지는 듣지 못했다. 경보음이 이미 성 전체를 뒤덮고 있었으니까. 박도경이 내 옆으로 붙어 걸음을 맞추며 상황을 보고했지만, 머릿속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 여자의 눈빛이 남아 있었다.
두려움이 없는 죄인. 위로를 거절하고 사실만 요구하는 여자.
흑성령에 도착한 첫날부터, 서지율은 내가 예상했던 그림과 하나도 맞아떨어지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