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대답을 해야 했다. 침묵으로 넘어갈 수 없는 순간이었다.
숲은 아직 어두웠다. 나무 틈으로 새어드는 새벽빛이 병사들의 갑옷에 부딪혀 희미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다들 나를 보고 있었다. 방금 내가 한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한 사람은 그중 몇 명이나 될까. 상관없었다. 왕자가 묻고 있었다. 대답해야 했다.
"…예." 나는 짧게 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는 게 스스로도 놀라웠다.
여섯 살짜리 몸으로 이만큼 태연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에는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전생의 기억이 몸에 남긴 습관 같은 거였다. 위기 앞에서 목소리를 떨지 않는 것. 그거 하나는 도움이 됐다.
왕자가 병사에게 다가가 발목을 직접 살펴봤다. 그의 손끝이 병사의 다리를 조심스럽게 훑었다. 상처가 있던 자리에는 얇은 흔적만 남아 있었다. 마치 며칠 전에 아물었던 상처처럼 깨끗했다. 병사는 그 자리를 몇 번이나 눌러보며 고통이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안 아픕니다." 병사가 중얼거렸다. "정말 안 아픕니다, 왕자님."
왕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그는 손끝으로 흔적을 한 번 더 문지르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름이 뭐지."
"강도윤입니다."
"가문은."
나는 잠시 멈췄다. 강씨 가문이라고 대답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이미 버려진 몸이니 그럴 필요가 없는지 순간 혼란이 왔다. 강만수의 성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껄끄러웠다. 하지만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었다. 이런 자리에서 거짓말은 오히려 화를 부를 뿐이다.
"강씨 가문에서… 헌납된 아이입니다."
왕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헌납이라는 단어가 그의 표정에 무언가를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짜증인지, 혐오인지, 그도 아니면 익숙한 씁쓸함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는 짧게 숨을 내쉬고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이 근방을 더 수색해라. 습격당한 마차의 생존자를 찾아야 한다."
병사들이 일어나 흩어졌다. 갑옷 소리가 절그럭거리며 숲속으로 퍼졌다. 절뚝이던 병사만이 여전히 놀란 눈으로 자신의 발목을 만져보고 있었다. 그는 몇 걸음 걸어보고, 다시 멈추고, 또 걸어봤다. 아무리 걸어도 통증이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왕자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눈높이가 맞춰졌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선이 더 뚜렷했다. 콧날이 곧았고, 눈매는 서늘했다. 나이는 이십 대 초중반쯤 되어 보였다. 갑옷 위로 두른 붉은 망토 끝자락이 흙바닥에 살짝 스쳤다. 저 정도 옷감이면 한 채 값은 되겠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가, 지금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지웠다.
"방금 그 힘, 회복마법이지." 그가 물었다.
"…예."
"몇 살이지."
"여섯 살입니다."
그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나는 그 표정을 읽으려 했지만,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시선이 불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두렵지도 않았다. 이미 두려워야 할 순간은 마차가 습격당했을 때 다 지나갔다.
"여섯 살짜리가 이 정도 수준의 회복마법을 쓴다는 건…" 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대신 나를 다시 훑어봤다. 사파이어색 머리카락, 낡은 옷, 몽이를 품에 안은 작은 몸.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내 품에 닿았을 때, 몽이가 마치 그 시선을 느낀 것처럼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물컹거리는 감촉이 손바닥에 그대로 전해졌다. 괜찮다. 얌전히 있어.
"헌납되었다고 했지. 무슨 뜻이지 자세히 말해봐라."
나는 짧게 상황을 설명했다. 강만수가 내 힘을 발견하고, 전쟁 물자라는 명목으로 나를 처리하기로 결정했다는 것. 마차가 습격당했고 나는 도망쳤다는 것. 몽이를 만난 것까지도 빠뜨리지 않았다. 말을 고르는 사이사이 숨을 골랐다.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이런 이야기를 담담하게 늘어놓는다는 게 스스로도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감정을 앞세울 때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짧게, 필요한 말만.
말을 하는 동안 왕자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처음엔 미간이 좁아졌고, 다음엔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마지막엔 아예 표정이 사라졌다. 감정을 억누르는 얼굴이었다. 다 듣고 난 뒤, 그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새벽빛이 나무 사이로 번지고 있었다. 새 몇 마리가 나뭇가지 사이를 옮겨 다니며 울었다. 평화로운 소리였다. 방금 들은 이야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그런 가문이 있다는 게 놀랍지도 않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자조 섞인 웃음이 그의 입가에 잠시 스쳤다. 그 웃음에는 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대한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게 아닌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시 나를 바라봤다.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강도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나는 그를 마주 봤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고 있었다. 두려움과는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손끝이 살짝 저렸다. 몽이를 감싼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방금 네가 한 일은, 왕국의 정규 회복마법사들도 쉽게 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그런데도 네 아버지라는 자는 그 재능을 이유로 너를 버렸다. 그건 명백한 국가 재원의 낭비고, 동시에 아동에 대한 학대다."
그의 말투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했다. 단어 하나하나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나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그냥 듣고만 있었다. 왕족이라는 사람의 입에서 학대라는 단어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적어도 이 사람은 강만수 같은 인간과는 다른 부류인 것 같았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지만.
"이대로 너를 다시 저 마차에, 혹은 전장으로 돌려보내는 건 국가적으로도 어리석은 일이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붉은 망토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크게 펄럭였다. "내가 왕궁으로 데려가겠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머릿속이 잠깐 하얘졌다. 왕궁이라니. 여섯 살짜리 몸으로 도망치던 처지에서 갑자기 왕궁이라는 단어를 듣는다는 건, 상상 이상의 낙차였다. 좋은 낙차인지 나쁜 낙차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왜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나는 물었다. 존댓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이 사람 앞에서는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격식을 갖춰야 할 상대라는 걸, 이유는 몰라도 몸이 먼저 알아챈 것 같았다.
왕자는 잠시 침묵했다가,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지. 지금은 시간이 없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크고, 따뜻해 보이는 손이었다. 갑옷 밑으로 드러난 손목에는 오래된 흉터 하나가 옅게 남아 있었다. 전장에서 얻은 상처처럼 보였다. 이 사람도 그냥 왕궁 안에 앉아 있는 부류는 아니라는 뜻이겠지.
"단, 이건 확실히 알아둬라. 왕궁으로 가는 순간부터 네 출신과 힘은 함부로 알려지면 안 된다. 헌납된 사연도, 그 재능도. 알려지는 순간 너를 노리는 자들이 늘어날 테니까."
그 말에는 경고와 배려가 동시에 섞여 있었다. 나를 위한 말인지, 그의 계획을 위한 말인지 아직은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사람의 선의와 의도는 언제나 겹쳐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나는 그 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내 손을 뻗었다. 몽이가 내 품에서 몸을 살짝 움직였다. 마치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듯이.
"이 아이도 함께 갈 수 있습니까." 나는 몽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왕자가 잠시 몽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몽이의 물컹한 몸을 몇 초간 훑었다.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슬라임 하나쯤, 문제 될 건 없겠지."
그렇게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은 생각보다 더 크고, 단단했다. 강씨 가문의 강도윤에서, 이름 없는 회복마법사로 향하는 첫걸음이었다.
손을 잡는 순간, 마차에서 도망치던 밤의 기억이 잠깐 스쳤다. 흙바닥을 뛰던 발, 몽이를 안고 넘어질 뻔했던 순간, 어둠 속에서 들리던 발소리. 그 모든 게 이 손 하나로 정리되는 건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손을 놓치면 다음은 없을 거라는 확신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왕자가 내 손을 잡고 돌아서는 순간, 그의 표정에 스치는 그림자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아주 짧은, 찰나의 그림자였다. 그는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나를 데려가려는 데에는, 단순한 동정심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정치적인 계산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 여섯 살짜리 아이를 이유도 말하지 않고 왕궁으로 데려가겠다는 왕족이 순수한 선의만으로 움직일 리는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그 손을 잡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강만수의 손에서 도망쳤다가 다시 마물이나 산짐승의 먹이가 되느니, 이 낯선 손을 믿어보는 게 그나마 나은 도박이었다.
숲 저편에서, 병사들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발소리, 그리고 다급한 숨소리가 뒤섞여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왕자님! 습격한 마물의 흔적이 아니었습니다. 이건… 사람이 낸 흔적입니다."
왕자의 손이 순간 굳었다.
내 손을 잡은 그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그가 무언가를 짐작하고 있다는 게, 그 짧은 떨림 하나로 고스란히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