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숲은 조용했다. 정확히는, 조용해야 했다.
나뭇잎 사이로 새벽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고, 흙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여 있었다. 마차가 뒤집힌 지 얼마나 됐는지 가늠도 안 됐다. 몸이 으슬으슬했다. 옷이 젖어 있었고, 어디선가 상처가 났는지 팔뚝이 따끔거렸다.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발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투둑, 투둑.
나뭇가지가 밟히는 소리. 하나가 아니었다. 여럿이었다. 나는 숨을 삼키고 몽이를 품에 더 세게 끌어안았다. 몽이는 작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마치 자기도 지금 상황을 아는 것처럼.
발소리의 주인은 병사였다. 갑옷을 입은 남자 셋이 나뭇가지를 헤치며 걸어왔다. 얼굴에 핏자국이 있었고, 그중 한 명이 다리를 절뚝이고 있었다. 갑옷은 여기저기 찍혀 있었고, 한 명은 방패 대신 부러진 창을 지팡이처럼 짚고 있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순찰대인 것 같았다. 나는 나무 뒤로 몸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등에 닿는 나무껍질이 거칠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는 게 아닌가 싶어서,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이 근방에 아이들이 있을 텐데." 한 병사가 말했다. 목소리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마차가 습격당했다는 보고가 있었어."
"찾아봤자 살아있겠어? 마물이 그렇게 우글거리는데."
다른 병사가 코웃음을 쳤다. 냉소적인 말투였다. 그러면서도 발을 멈추지 않고 계속 수풀을 헤치는 걸 보면,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찾으라는 명령이니 찾아야지. 왕자님 성격 알잖아."
왕자님. 그 단어가 귀에 걸렸다. 여기가 그냥 지나가는 순찰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는 숨을 죽였다. 이들에게 발견되면 다시 마차로, 다시 전장으로 끌려갈 게 뻔했다. 여섯 살짜리가 전장에 왜 필요한지는 몰라도, 좋은 이유는 아닐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여기 혼자 남는 것도 답이 아니었다. 마물이 우글거린다는 말이 방금 나온 말이었다. 숲에서 혼자, 아무 방비도 없이 밤을 넘긴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선택지가 둘 다 나빴다. 그럼 뭘 골라야 하나.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그때 절뚝이던 병사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쿵.
낮은 신음이 뒤따랐다. 다리를 감싸며 몸을 웅크리는 모습이 나무 사이로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다른 병사가 다가갔다. 목소리에 걱정이 배어 있었다.
"발목이…" 넘어진 병사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아까 마물한테 물린 상처가 벌어졌어."
바지를 걷어 올린 그의 발목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흐르는 양만 봐도 상처가 꽤 깊어 보였다. 그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숨소리가 짧아지고 거칠어졌다.
"지혈부터 해야 합니다." 남은 병사가 허리춤에서 천 조각을 꺼내려 했지만, 손이 떨려 제대로 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붕대가 다 어디 갔어."
세 사람 다 초조해 보였다.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험한 일을 겪었는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나무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머릿속으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저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된다. 다시 마차로 끌려가면 안 된다. 그런데 저 발목은, 지금 저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강만수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 내 힘을 처음으로 목격했던 사람. 그 후로 일이 어떻게 굴러갔는지, 나는 아직도 정확히 모른다. 다만 좋은 방향은 아니었다는 것만 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순간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무 뒤에서 나와, 그들 앞으로 걸어갔다. 머리가 아니라 다리가 먼저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세 병사가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놀란 표정들이었다. 아이 하나가 갑자기 숲속에서 나타났으니 당연했다. 게다가 옷이 다 젖고 흙투성이인 남자아이가, 그것도 슬라임 한 마리를 안고 있었으니 더 이상했을 거다.
"넌 뭐냐." 한 명이 검을 반쯤 뽑아 들었다. 챙, 하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몸이 굳었다. 검이 저렇게 쉽게 나온다는 게,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다시 알려줬다.
"습격당한 마차에 있던 아이입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썼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발목을 치료할 수 있어요."
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의심스러운 얼굴이었다. 여섯 살짜리 아이가 치료를 한다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검을 뽑았던 병사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헛소리 말고 저리 가 있어라. 위험한 곳이니."
"진짜예요."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시간 없어요. 저 발목, 지금 상태로 더 두면 안 좋아져요."
내가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올 줄 몰랐는지, 병사들이 잠깐 멈칫했다.
다친 병사의 얼굴이 점점 더 하얘지고 있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고, 숨소리가 짧아졌다. 시간이 없었다.
"그냥 해보게 둬." 다친 병사가 힘없이 말했다. "손해 볼 거 없잖아."
동료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섰다.
나는 그의 발목 앞에 무릎을 꿇었다. 흙바닥이 차가웠다.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 물린 자국이 선명했고, 주변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이미 독이 조금 돈 것 같기도 했다.
손을 얹었다.
집중했다. 몽이를 처음 만났을 때 힘이 발동하지 않았던 이유를 나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때는 낯선 존재에 대한 경계심이 앞섰다. 지금은 달랐다. 이 사람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였다. 살리고 싶다는 마음이, 두려움보다 앞섰다.
손끝에서 푸른빛이 돌았다.
빛은 처음엔 미약했다가, 점점 밝아졌다.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갈라진 피부가 맞붙고, 흐르던 피가 멈췄다. 병사들이 숨을 멈추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숲의 정적 속에서, 오직 내 손끝의 빛만이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검을 뽑았던 병사가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치료가 끝났다. 다친 병사가 발목을 움직여보더니,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몇 번이나 발을 굽혔다 펴며 확인했다.
"아프지 않아…" 그가 자기 발목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정말 아프지 않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그 표정을 이해했다. 나 역시 처음 이 힘을 알았을 때, 비슷한 얼굴을 했을 것 같았다.
나는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힘을 쓴 직후의 익숙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다리가 살짝 후들거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거운 건, 이걸 목격당했다는 사실이었다.
망했다.
세 명이나 봤다. 강만수 한 명이었을 때도 일이 커졌는데, 이번엔 셋이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군인이었다. 보고를 안 할 리가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하지만 다리에 힘이 없었다. 그리고 도망친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미 본 걸 안 봤다고 할 수는 없었다.
몽이가 내 다리에 몸을 바짝 붙였다. 작은 몸의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나를 위로하듯이.
병사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눈빛이었다. 의심 대신, 뭔가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경계인지, 경외인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이 아이를…" 다친 병사가 입을 열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참이었다.
그때, 숲 사이로 또 다른 인기척이 다가왔다. 이번엔 발소리가 훨씬 가벼웠다. 병사들이 아니었다.
투둑.
나뭇가지 하나가 밟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거기, 무슨 일이지."
낮고 정중한, 하지만 위엄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 한 마디에 세 병사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왕자님."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무 사이로 걸어오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금발을 단발로 정리한, 키가 크고 얼굴선이 뚜렷한 남자였다. 갑옷 위에 걸친 붉은 망토가 새벽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걸음걸이에 흔들림이 없었다. 이 숲에, 이 시간에, 이런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였다.
이서준. 병사들이 부른 호칭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해동왕국의 왕자.
가까이서 보니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눈빛만큼은 나이보다 훨씬 무거웠다. 오랫동안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의 결과를 책임져온 사람 같은 눈빛이었다.
그의 시선이 다친 병사의 발목, 그리고 나에게로 옮겨갔다.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발목을 한 번, 나를 한 번, 그리고 다시 발목을 봤다. 뭔가를 재는 듯한 시선이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말해봐." 그가 물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거절을 허용하지 않는 힘이 있었다.
병사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다친 병사가 입술을 몇 번 뗐다가 다시 다물었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힘을 목격당한 게 처음이 아니었다. 강만수도 봤고, 이제 병사들도 봤다. 그리고 지금, 왕국의 왕자가 그 결과를 캐묻고 있었다.
이보다 더 나쁜 타이밍이 있을까 싶었다. 아니,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더.
도망칠 곳은 없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나무뿐이었고, 그 나무들 사이로 빠져나가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몽이가 내 다리에 몸을 바짝 붙였다. 마치 나를 위로하듯이. 아니면 각오하라는 뜻이었을지도.
왕자의 눈이 나를 정면으로 향했다. 그 시선이 나를 훑고, 발목에서 흘렀던 피의 흔적이 사라진 자리를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봤다.
"네가 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