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밥집 주인, 왕궁을 구하다

3화

17년 전, 4월. 등불마을에 봄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손님이 없었다. 저녁 여섯 시가 넘었는데도 식당 안에는 나 혼자였다.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육수 냄새만 진하게 배어 있었다. 창밖으로 빗소리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오늘 장사는 이걸로 접어야겠다.' 나는 생각하며 앞치마를 풀었다. 문을 잠그러 나가는데, 문 앞 처마 밑에 뭔가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비에 젖은 작은 여자아이였다. 체구가 유난히 작아서 처음엔 강아지인가 싶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옷이 다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고, 손톱 밑까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얘, 여기서 뭐 하니?" 내가 물었다. 아이는 대답 대신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열에 들뜬 것처럼 흐릿했다.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 눈이었다. 손을 대보니 이마가 불덩이였다. '이거 큰일이네.' 나는 서둘러 아이를 안아 식당 안으로 들였다. 몸이 어찌나 가벼운지 놀랄 지경이었다. 일곱 살이나 됐을까 싶은 몸무게였다. 주방에서 마른 수건을 있는 대로 꺼내 왔다. 담요를 덮이고 물수건으로 열을 닦아내는 사이, 아이는 계속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마력이... 넘쳐서... 몸이..." 아이가 겨우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저 열 때문에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아이는 마력을 과하게 타고나 몸이 자주 쇠약해지는 체질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떠돌아다닌 탓에 상태가 더 나빠져 있었다. "이름이 뭐니?" 내가 물었다. "소하... 윤소하..." 아이가 겨우 대답했다. 나는 밤새 죽을 끓여 한 숟갈씩 아이 입에 넣어주었다. 쌀을 오래 불려 곱게 갈아 넣은 죽이었다. 소하는 삼키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숟가락이 입술에 닿으면 조금씩 벌어졌다가, 다시 꾹 다물어지곤 했다. '제발 좀 넘어가라.' 나는 속으로 빌면서 죽을 떠먹였다. 새벽 세 시쯤, 열이 41도까지 올랐다. 이마에 얹은 물수건이 금세 뜨거워질 정도였다. 나는 수건을 갈고, 또 갈았다. 그렁그렁한 숨소리를 들으며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사흘 밤낮을 지새운 끝에 열이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흘째 아침, 소하는 처음으로 눈을 제대로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줌마는... 누구예요?" 소하가 작게 물었다. "여기 식당 주인이야. 이름은 서혜란." 내가 대답했다. 소하는 그 말을 듣고도 별 대답이 없었다. 그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식당 뒷골목에서 도현을 처음 만났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본 참이었다. 덩치는 컸지만 나이는 소하보다 조금 위 정도로 보였다. 아홉 살, 어쩌면 열 살 정도 됐을까 싶었다. 식당 뒤편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는데, 상한 빵 조각을 손에 쥐고 있었다. 빵에는 이미 곰팡이가 파랗게 슬어 있었다. "그거 먹으면 배 아파." 내가 말을 걸었다. 아이는 흠칫 놀라며 도망치려 했다. 빵 조각을 손에 쥔 채로 몸을 홱 돌리는데, 신발 밑창이 다 벌어져 있는 게 보였다. "기다려, 뜨거운 밥 줄게." 내가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아이는 한참을 경계하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문턱을 넘으면서도 계속 뒤를 살폈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러는 게 안타까웠다. 이름을 물으니 "강도현"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나는 밥과 국을 큰 그릇에 담아 내주었다. 도현은 처음엔 숟가락을 쥐고도 먹지 않았다. "안 뜨거워, 어서 먹어." 내가 다시 권했다. 그제야 조심스럽게 한 숟갈을 떠먹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그릇을 비웠다. 국물까지 다 마셔서 그릇 바닥이 훤히 드러날 정도였다. "더 줄까?" 내가 물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그냥 빈 그릇을 내 앞으로 슬쩍 밀었다. 나는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밥을 두 그릇째 더 담아주었다. 두 아이 모두 부모가 없었다. 소하는 마을에서 떠돌다 흘러왔고, 도현은 근처 산속 오두막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어린 나이에 혼자 지냈는지 물어봐도 두 아이 다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그저 눈을 피하며 고개를 젓기만 했다. 나는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물어봐서 뭐가 달라지겠나.' 나는 생각했다. 그날부터 두 아이에게 매일 밥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아침 여섯 시, 식당 문을 열기 전에 두 그릇을 먼저 준비했다. 소하는 처음엔 말이 없었지만, 국물을 뜬 숟가락을 받아 들 때마다 조금씩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일주일이 지나자 소하는 먼저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줌마, 안녕하세요." 소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한마디에 나는 하루 종일 마음이 놓였다. 도현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식당 근처를 떠나지 않고 어슬렁거렸다. 식당 앞 평상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다. "왜 안 가니?" 내가 물었다. "할 일 없어서요." 도현이 짧게 대답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설거지를 시켰다. 그릇 서른 개 남짓을 씻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서투른 손으로 그릇을 닦는 도현의 모습을 보며, 나는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비누 거품을 손등까지 묻힌 채 열심히 문지르는 모습이 어린애다웠다. 그렇게 두 아이는 매일 온기식당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소하의 열은 완전히 내렸지만, 몸은 여전히 약했다. 조금만 뛰어도 숨을 몰아쉬었고, 얼굴이 금세 하얘졌다. 도현의 배는 조금씩 채워졌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경계가 남아 있었다. 누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면 어깨를 움찔하며 몸을 웅크렸다. 나는 두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이 아이들, 그냥 두면 안 되겠다.' 저녁 장사를 끝내고 나서도 한참을 두 아이 얼굴만 들여다보았다. 소하는 평상에 앉아 졸고 있었고, 도현은 그 옆에서 물끄러미 소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간 것도 아닌데, 어느새 서로를 살피는 눈치였다. 그날 밤, 나는 식당 뒷방을 비워 두 아이의 자리를 만들었다. 낡은 이불 두 채를 꺼내 나란히 깔았다. 방구석에 쌓여 있던 잡동사니들도 다 치워냈다. 작은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와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오늘부터는 여기서 자면 되겠다.' 나는 생각하며 이불을 한 번 더 매만졌다. 두 아이가 이 방에서 지내게 될 줄은, 그날의 나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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