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정오가 막 지난 시각이었다.
식당 안에는 아직 국밥을 먹고 있는 손님이 여섯이었다.
박씨 아저씨는 언제나처럼 창가 자리에 앉아 국밥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이고 있었다.
나는 주방에서 갓 뽑아낸 육수를 큰 솥에 붓고 있었다.
멸치와 다시마로 우려낸 육수 냄새가 식당 안 가득 퍼지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였다.
나는 국자를 든 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은 갑옷을 입은 호위 병사들 사이로, 검은 관복 차림의 전령이 말에서 내리고 있었다.
가슴에 새겨진 문양이 낯설지 않았다.
왕실의 인장이었다.
'왕실 사람들이 왜 여기까지.' 심장이 먼저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식당 문이 열리고 가장 앞에 선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키가 크고 등이 곧은 남자였다.
검은 관복의 옷깃에는 낯선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허리춤에는 금색 인장이 박힌 목함이 달려 있었다.
나이는 서른 안팎으로 보였고, 눈빛이 날카로웠다.
식당 안에 있던 손님들이 일제히 숟가락질을 멈췄다.
박씨 아저씨도 소주잔을 든 채로 굳어버렸다.
남자는 식당 안을 한 번 훑어보더니 곧장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국자를 놓고 앞치마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이 식당 주인이 맞나?" 남자가 물었다.
목소리가 낮고 위압적이었다.
"네... 제가 주인입니다." 내가 겨우 대답했다.
남자는 허리춤에서 금색 인장이 박힌 목함을 꺼냈다.
"성녀 윤소하 님과 근위기사단장 강도현 님께서 그대를 지목하셨다." 남자가 말했다.
나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소하와 도현이.'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뛰었다.
십칠 년 전 헤어졌던 두 아이의 이름이 이런 자리에서 다시 나올 줄은 몰랐다.
손에 쥔 앞치마 자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이 지금 그 자리에 있다고.'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성녀와 근위기사단장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높은 자리인지 나도 알고 있었다.
평민은 감히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자리였다.
"왕세자 저하께서는 지금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는 상태다." 남자가 목함 속 서찰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서찰에는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치유마법으로 겨우 버티고 있으나, 그것도 한계에 다다랐다는 진단이 나왔다." 그가 말했다.
"어의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가 덧붙였다.
"그런데 그게 왜 저와 관련이..."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성녀님과 기사단장님이 은인이라 부르는 사람이 당신이라 했다." 남자가 잘라 말했다.
"밥으로 사람을 살리는 재주가 있다고 했지." 그가 나를 다시 훑어보며 물었다.
말투에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내 낡은 앞치마와 손등에 남은 화상 자국을 훑고 지나갔다.
"이런 촌구석 밥집에서 그런 재주가 나온다니, 믿기지 않는군."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런 재주로 왕세자 저하를 살릴 수 있겠나?" 그가 물었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손끝이 떨려오는 걸 느꼈다.
'왕실.' 그 단어만으로도 나는 이미 얼어붙고 있었다.
전생에서 나는 권력을 가진 남자의 아내였다.
그가 명령하면 나는 따라야 했고, 내 의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눈짓만 해도 나는 고개를 숙였고, 그가 손을 들면 나는 몸을 움츠렸다.
그 기억이 지금 이 순간, 이 남자의 말투 속에서 그대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또 시작이구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또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구나.'
"사흘의 시간을 주겠다." 남자가 말했다.
"사흘 후, 도성으로 갈 채비를 마쳐라." 그가 명령하듯 말했다.
"제가... 못 가겠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겨우 물었다.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듯 작았다.
남자는 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밥집 주인 따위가 왕실의 부름을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가 되물었다.
"거절한다면 이 식당이 어떻게 될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식당 안이 완전히 정적에 잠겼다.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박씨 아저씨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소주잔을 채 비우지도 못한 채 지갑에서 돈을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 국그릇을 남긴 채 식당을 빠져나갔다.
젊은 부부가 아이의 손을 잡고 급히 일어섰고, 노인 한 명은 지팡이를 짚으며 문 쪽으로 향했다.
식당 문이 열릴 때마다 바깥의 찬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남자는 목함을 다시 닫으며 자리를 떠났다.
그가 몸을 돌리자 관복 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뒤따라온 병사들도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고, 식당 안에는 나만 남았다.
나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솥 안의 육수가 여전히 끓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챙길 정신조차 없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왜 지금.' 나는 속으로 되물었다.
'왜 하필 지금 나타난 걸까.'
십칠 년이었다.
십칠 년 동안 나는 그 아이들의 소식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전쟁고아였던 두 아이를 거두어 밥을 먹이고 재워주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이 목표였을 뿐, 그 아이들이 지금 어떤 자리에 있을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소하야. 도현아.' 나는 두 아이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십칠 년 전의 기억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작고 마른 몸으로 문 앞에 쓰러져 있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흙투성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던 그 눈빛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 눈빛과 지금 이 순간이 겹쳐지면서, 나는 가슴이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그 아이들이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니.'
기쁨보다 먼저 두려움이 앞섰다.
왕실이라는 단어가 다시 한번 내 머릿속을 무겁게 짓눌렀다.
사흘.
사흘 안에 이 식당을 정리하고 도성으로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텅 빈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낡은 나무 탁자와 삐걱거리는 의자들, 그리고 오래된 국밥집의 냄새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곳을 떠난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실감 나지 않는 것은, 도성에 도착하면 마주하게 될 두 사람의 얼굴이었다.
십칠 년 전, 헤어지던 그날의 마지막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식당 밖으로는 여전히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바람 소리 속에서 십칠 년 전의 그 봄날을 떠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