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애완 성녀의 각성

5화

그날 오후, 정화 마법 실습이 끝난 뒤 아라는 두꺼운 교재 세 권과 필기구가 담긴 가죽 케이스를 한아름 안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다음 수업은 고대어 해석학이었는데, 담당 교수가 지각에 유독 엄격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라 마음이 급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 분밖에 남지 않았고, 강의실은 별관 삼 층이었으니 이대로라면 아무리 서둘러도 늦을 판이었다. 그 조급함이 오히려 발밑을 헐겁게 만들었다. 계단 돌바닥은 오래되어 군데군데 닳아 있었고, 아라는 그것을 알면서도 시선을 앞이 아니라 손목시계로 향한 채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계단 중턱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갑작스러운 힘이 등을 밀쳤다. 손바닥으로 짧고 정확하게, 넘어지기에 딱 알맞은 방향으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라는 균형을 잃고 앞으로 쏠렸고, 손에 들고 있던 교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종이가 팔락이는 소리와 가죽 케이스가 계단 모서리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쿵. 몸이 계단 모서리에 부딪치는 순간, 아라는 짧은 비명을 삼켰다. 시야가 뒤집히고, 팔다리가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사이, 다행히 마지막 순간 성령조 설우가 커다란 새의 형상으로 변해 날아들어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기에, 계단 아래로 완전히 떨어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설우의 날개에 부딪힌 어깨와 계단 모서리에 찍힌 무릎에는 이미 시퍼런 멍이 올라오고 있었고, 손바닥 여기저기 긁힌 자국에서 옅은 핏방울이 배어났다. "아……!" 아라가 짧게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채 고개를 들었을 때, 계단 위쪽에서 한도희가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지켜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여유로운 자세였다. 그 옆에 서 있던 몇몇 학생들도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서로 눈치를 주고받고 있었다. "어머, 미끄러지셨나 봐요." 한도희가 입가에 조소를 띠며 말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날카로움은 감출 수 없었다. "평민 출신은 계단 오르는 것도 서투른가 봐요, 여우 같은 것." 여우 같은 것. 미천한 것. 그 말들이 귓가에 박히자, 아라의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된 기억의 조각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어린 시절, 빈민가의 좁은 골목에서 또래 아이들에게 밀쳐지고, 흙바닥에 쓰러진 채 웃음거리가 되었던 그날의 감각이 지금의 통증과 겹쳐지며 아라의 온몸을 뒤덮었다. 그때도 이렇게 무릎이 까졌었고, 그때도 저런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었다. 숨이 가빠지고 시야가 흐려졌다. 이건 지금이 아니라 그때인가. 아니, 지금인데도 그때 같았다. 손끝이 떨리고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아라는 자신도 모르게 두 팔로 몸을 감싸며 몸을 웅크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매질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아서, 그것을 지켜보던 한혜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라 님! 아라 님, 정신 차려요!" 한혜미가 계단을 뛰어 내려오며 아라의 몸을 붙잡았다. 다급함에 치맛자락이 계단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그것을 개의치 않고 아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이 닿는 순간, 아라는 겨우 현실로 돌아온 듯 눈을 깜빡였는데,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그제야 자각했다. 언제부터 울고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본 성령조가 목격했다." 설우가 다시 작은 새의 형태로 돌아와 아라의 어깨 위에 앉으며 냉정한 음성으로 선언했다. 깃털 하나 흐트러짐 없이, 그 작은 몸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위엄으로 가득했다. "한도희가 대상자의 등을 고의로 밀친 것을 확인했다. 이는 대성녀님께 보고될 사항이다." 한도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지만, 곧 다시 표정을 다잡으며 코웃음을 쳤다. "증거가 어디 있어. 그저 넘어진 걸 가지고 트집이나 잡는 거지. 저 미물 새 한 마리 말을 누가 믿는다고." "미물이라……" 설우의 붉은 눈이 가늘어지며 한도희를 응시했다. "본 성령조의 눈은 거짓을 담지 않는다. 그 말,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계단 위쪽에서 걸어오던 발걸음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화려한 예복을 입은 이시우가 그 자리에 서서, 방금 벌어진 상황을 처음부터 목격한 듯 서늘한 눈으로 한도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걸음마다 예복 자락이 낮게 스치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조차 계단 위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다. "방금……" 이시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는데, 그 안에 담긴 분노가 계단 전체를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내 성녀를 밀친 것인가." 한도희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빠져나갔다. 학생들이 하나둘 자리를 슬금슬금 피하기 시작했지만, 이시우의 시선은 오직 쓰러진 아라에게로만 향해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와 아라의 곁에 무릎을 꿇었을 때, 예복이 계단의 먼지를 그대로 뒤집어썼지만 그는 그것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아라는 여전히 몸을 떨며 한혜미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은가." 이시우가 손을 뻗으려 했지만, 아라는 그 손을 반사적으로 피하며 몸을 움츠렸다. 손끝이 닿기도 전에 등이 굳고 어깨가 움츠러드는, 몸에 새겨진 오래된 반응이었다. 그 반응에 이시우의 표정이 순간 당혹으로 물들었는데, 자신의 손길조차 거부당하는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저 손을 허공에 멈춘 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백서린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자신의 심복이 이토록 공개적으로 왕태자의 분노를 사게 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쥐어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지만, 그보다 더 짙게 배어 있는 것은 아라를 향한 새로운 종류의 살의였다. 저 계단에서 넘어진 것이 아라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끝났어야 했다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계산이 그녀의 눈빛 속에서 조용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계단 아래로 흩어진 교재들 사이에서, 아라는 여전히 떨리는 손끝으로 바닥을 짚은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찢어진 책장 한 귀퉁이가 바람에 팔락였고, 그 소리마저 지금 이 순간을 더 낯설고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날의 기억이, 오래전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상처가, 이렇게 다시 그녀를 붙잡을 줄은 아무도 몰랐고, 그것을 지켜보는 세 사람의 눈빛 역시 각자 다른 무게로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붕괴의 한가운데, 아라는 여전히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곳에 홀로 웅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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