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애완 성녀의 각성

3화

왕태자궁의 정원은 온갖 이국적인 꽃들로 가득했는데, 저녁 다섯 시가 되면 아라는 어김없이 그곳으로 향해야 했다. 붉은 꽃잎이 겹겹이 쌓인 알현화부터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푸른 이파리의 덩굴까지, 이곳의 식물들은 모두 낯선 대륙에서 건너온 것들이라 아라의 눈에는 매번 이질적으로 느껴졌는데, 그 화려함이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대처럼 여겨져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위축되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정원 입구에 들어서자, 이시우가 이미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의 곁으로 다가가는 발걸음이 매번 무거웠다. 벤치 옆으로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저녁 햇살이 그의 옆얼굴에 걸쳐 있어서, 마치 세필로 정성스레 그려낸 초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라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 얼른 고개를 저었다. "늦었군." 이시우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수, 수업이 늦게 끝나서요……." 아라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이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가까워지는 거리에 아라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이 두려움인지 다른 무언가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수업이라 함은, 그 예법이라는 것 말인가." 이시우가 묻자 아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실 예법 수업이라고 해봐야 낡은 서책 한 권을 붙들고 발음도 어색한 고어를 외우는 게 전부였는데, 그걸 시시콜콜 설명하기엔 스스로도 민망했다. "고단하겠군." 이시우가 짧게 말했는데, 그 무뚝뚝한 한마디에 담긴 걱정이 낯설어서 아라는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시선을 떨구었다. 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당탕, 정원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놀라 흩어졌고, 아라는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오늘 아침 분명 하늘이 맑았는데, 이 나라의 날씨는 대체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 건지, 이런 순간에도 실없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런데 이시우가 재빠르게 자신의 외투를 벗어 아라의 머리 위로 씌워주며, 어깨를 감싸듯 가까이 붙어 섰다. 외투 안쪽에서 옅게 남아 있는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져와서, 아라는 순간 숨을 멈췄다. "가, 감사합니다……." 아라가 더듬거리며 인사했지만, 이시우의 팔이 자신의 어깨에 닿아 있다는 사실이 자꾸 신경 쓰여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야 당연한 것 아닌가." 이시우가 태연하게 답했지만, 그 목소리 끝에 담긴 어딘가 만족스러운 기색을 아라는 놓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아라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즐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 옷이 다 젖으실 텐데요." 아라가 걱정스레 말했지만, 이시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 몸은 감기 따위에 걸리지 않으니 염려 말게." 이시우가 그렇게 말하며 오히려 외투를 더 바짝 여며주는 통에, 아라는 그 손짓 하나에도 얼굴이 화끈거려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때 정원 저편에서 백서린이 우산을 쓴 채로 걸어오다 그 광경을 보고 멈춰 섰다. 아영 공작가의 딸다운 화려한 은발이 빗물에 살짝 젖어 있었는데,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 차갑게 얼어붙는 것을 아라는 똑똑히 보았다. 백서린의 우산은 은실로 자수를 놓은 값비싼 것이었는데, 그 화려함조차 지금 이 순간에는 그녀의 표정을 더 서늘하게 만드는 배경일 뿐이었다. "태자님, 저를 두고 다른 여자를 그렇게 감싸주시다니……. 참으로 재미있는 취미시네요." 백서린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지만, 그 웃음 속에 담긴 날카로움이 아라의 살갗을 스쳤다. "백 영애, 이건 그저 보호 임무일 뿐이오." 이시우가 무심하게 대답했는데, 그 무심함이 오히려 백서린의 표정을 더 굳게 만들었다. "보호 임무라……. 그런 것치고는 참 다정하시네요." 백서린이 우산을 살짝 기울여 아라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이 마치 값을 매기는 저울 같아서, 아라는 저도 모르게 이시우의 외투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태자님, 궁 안의 소문이란 게 참 무섭더군요. 어떤 하녀가 태자님의 눈에 들었다는 이야기가 벌써 시녀들 사이에서 돌던데, 설마 그게 사실은 아니겠지요?" 백서린이 던진 말에 아라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소문이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런 말들이 궁 안을 떠돌고 있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소문이란 대개 근거 없는 것이지." 이시우가 냉랭하게 잘라 말했지만, 그 대답이 오히려 백서린의 의심을 더 부추기는 듯했다. 백서린은 그 말을 끝으로 우산을 접고는 홱 돌아서 가버렸는데, 그 뒷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정원의 빗줄기보다도 차가웠다. 몇 걸음 걸어가다 말고 그녀가 잠시 멈춰 서서 어깨 너머로 아라를 한 번 더 돌아보았는데, 그 눈빛이 마치 두고 보자는 경고처럼 느껴져 아라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라는 그제야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실감했다. 왕태자의 관심이라는 것이, 실은 자신에게 보호가 아니라 새로운 위험을 끌어오는 도화선이라는 것을. 아영 공작가라면 이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세력가라던데, 그런 집안의 영애에게 미움을 사서 좋을 게 뭐가 있을까 싶어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저,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라가 외투를 벗어 이시우에게 돌려주며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이시우가 손목을 붙잡았다. "왜 그렇게 급히 가려는 거지." 이시우가 물었는데, 그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자신의 배려가 상대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손목을 붙잡힌 자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라는 그 손을 뿌리치지도 못한 채, 그저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며 대답을 고르고 있었다. "저, 그게……." "방금 그 여인이 한 말 때문인가." 이시우가 정확히 짚어내자 아라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신경 쓸 것 없다. 백 영애의 말은 늘 저러하니." "하지만 태자님, 저 같은 것이 그런 소문의 중심에 서면……." 아라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하녀 신분에 왕태자와 얽힌 소문이 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걸 모를 리 없는 이시우가 왜 이렇게 태연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불편한가." 이시우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불편한 게 아니라……" 아라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한구석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는데, 그것이 두려움도 아니고 완전한 거부감도 아닌, 어딘가 애매한 동요였기 때문이었다. "태자님과 이렇게 있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 과분한 일이라서요." 아라가 겨우 그렇게 말을 짜냈다. 그 말이 진심의 절반쯤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이시우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빗줄기가 그의 어깨 위로, 이제는 외투 없이 그대로 떨어지고 있었는데도 그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저 아라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살짝 풀었다가 다시 조이며, 뭔가를 가늠하는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이시우는 손을 놓아주었지만,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눈빛에는 뭐라 형언하기 힘든 갈증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가보게." 그가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을 뿐, 더는 붙잡지 않았다. 아라는 빗속을 뚫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었다. 젖은 치맛자락이 다리에 감겨 걸음을 방해했지만 멈추지 않았고, 정원을 벗어나 회랑에 다다를 때쯤에야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는데, 그것이 뛰어온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스스로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아라는 젖은 옷을 벗어두고 침대에 누웠다가 문득 손목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묻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빗소리가 이어지고 있었고, 그 소리를 들으며 아라는 낮에 백서린이 던졌던 말들을 곱씹었다. 하녀가 태자의 눈에 들었다는 소문이라니, 그것이 사실이 되어버리는 순간 자신에게 닥칠 일들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런 감정을 품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을, 그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손목에 남은 그 온기만은, 아무리 애써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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