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 아라는 귀청을 때리는 종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낯선 천장, 낯선 침구, 낯선 공기…… 아직도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아 잠깐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오, 늦었나 싶어 허둥지둥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난 아라는 옷장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정교하게 재단된 교복이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는데, 그 화려함이 오히려 부담스러워서 손끝이 살짝 떨렸다.
소매 단추 하나를 잘못 채워서 다시 풀었다가, 이번엔 조끼 고리를 엉뚱한 구멍에 끼웠다가, 결국 시간에 쫓겨 그냥 그대로 뛰쳐나갔다. 복도를 뛰어가며 머리를 대충 손으로 정리하는데, 지나가던 시녀 하나가 흠칫 놀란 얼굴로 아라를 쳐다봤다. 아, 이것도 예법에 어긋나는 걸까. 아라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아라는 낯선 풍경 앞에서 발이 얼어붙었다. 긴 테이블 위에 놓인 은식기들이 종류별로 늘어서 있었는데, 포크만 세 개, 스푼도 두 개, 게다가 접시는 왜 이렇게 겹쳐져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반짝반짝 광이 나는 그것들이 마치 시험지처럼 아라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어느 것을 먼저 써야 하는지, 이 순서가 맞긴 한 건지, 아라는 속으로 진땀을 빼며 옆자리를 슬쩍 살폈다. 옆에 앉은 학생은 여유롭게 포크를 집어 들었는데, 그 손짓 하나에도 우아함이 배어 있어서 아라는 괜히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바깥쪽부터 안쪽으로, 코스 순서대로 쓰는 거예요." 옆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색 머리를 곱게 땋아 내린 소녀가 웃으며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매가 부드럽고 따뜻한 인상이었다. 마치 봄볕이 스며든 그림 같은 얼굴이었다. "저는 한혜미예요. 풍요의 성녀 후보고요, 아라 님과 같은 기숙사 이웃이에요."
"아, 저, 저는 서아라예요……." 아라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았다. 처음으로 자신을 경멸하지 않는 눈빛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이 뭉근하게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줄곧 곁눈질과 수군거림 속에서 살아온 아라에게, 그 다정한 시선 하나가 이렇게까지 위로가 될 줄은 몰랐다.
한혜미는 포크 쓰는 법부터 시작해서, 귀족 학원 특유의 인사법, 심지어 계단을 오를 때 치맛자락을 잡는 각도까지 조곤조곤 알려주었는데, 그 세세함이 지나쳐서 아라는 몇 번이나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이렇게, 손목은 너무 꺾지 말고요." "인사할 때 시선은 상대의 턱 끝 정도를 보시면 돼요." "계단에서는 왼손으로만 치맛자락을 잡아야 해요, 오른손으로 잡으면 예법에 없는 몸짓이라 이상하게 봐요."
"치맛자락 각도까지 정해져 있다니, 이건 좀……." 아라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한혜미가 킥킥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 귀족들은 숨 쉬는 법에도 예법이 있을걸요."
"숨 쉬는 것도요?" 아라가 눈을 크게 뜨자 한혜미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물론 농담이에요. 그렇지만 진짜 그럴 것 같지 않아요? 여기 사람들 보면요."
둘이 나란히 웃음을 터뜨리는 사이, 창밖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팔랑거리며 날아들어 식탁 한쪽에 얌전히 앉았다. 참새보다 조금 큰 몸집에 회백색 깃털을 가진 그 모습은 도무지 어제 밤 창틀에 있던 존재와 같아 보이지 않았는데, 조그마한 발로 톡톡 걸어와 아라의 접시 옆에 자리를 잡는 모습이 우스울 정도로 귀여웠다. 한혜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머, 이 아이가 아라 님 성령조인가요? 작고 귀엽네요."
"본 성령조는 필요에 따라 형태를 조정할 수 있다." 설우가 새의 몸에서 나올 리 없는 딱딱한 어투로 대답하자, 한혜미가 놀라서 딸꾹질을 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목소리가……! 완전 딱딱한 아저씨 같아요!"
"본 성령조를 아저씨라 칭하지 마라." 설우가 부리를 딱딱 부딪치며 항의했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우스워서 한혜미는 배를 잡고 웃었다.
아라도 그제야 웃음이 터졌다. 이 낯선 세계에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마음 놓고 웃어본 것이 얼마 만인지 싶었다. 새가 접시 위의 빵 조각을 쪼아 먹는 모습을 보며, 아라는 아주 잠깐, 이곳이 그렇게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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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시작되자 상황은 다시 팽팽해졌다. 정화 마법 실습 시간, 넓은 강의실 안에는 냉랭한 공기가 감돌았고, 학생들은 저마다 곁눈질로 아라를 흘겨보았다. 평민 출신의 정화의 성녀 후보라는 소문이 이미 학원 전체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소량의 오염된 마정석을 나눠주며 정화를 시도해보라 했는데, 손바닥만 한 검은 돌덩이가 아라의 손에 놓이는 순간부터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라가 손을 대는 순간 마정석에서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다른 학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저건 뭐야, 평민 출신이라 마력이 불순한 거 아니야?" 뒤쪽에서 누군가 낮게 비웃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라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손이 떨리는 것을 감추려 마정석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래, 실패하면 그냥 실패하는 거지. 뭐 어쩌겠어.' 속으로 자조적인 위안을 삼키며 아라는 눈을 감고 배운 대로 마력을 흘려보냈다. 딱히 확신은 없었다. 그저 어제 배운 감각을 더듬더듬 따라갈 뿐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검은 안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라의 손끝에서부터 서서히 하얗게 물들어갔다. 마치 먹물에 떨어진 물방울이 번지듯, 그 흐름이 점점 넓어지며 마정석 전체를 감쌌다. 다른 학생들이 몇 시간을 애써도 반쯤 정화하는 것을, 아라는 채 몇 분 만에 완전히 맑은 결정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강의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교수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고, 방금 전 비웃던 학생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교수는 마정석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빛에 비춰보았는데, 그 투명함이 마치 잘 세공된 보석 같아서 강의실 여기저기서 낮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이, 이건……." 교수가 마정석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순도가 최상급이다……. 자네, 정화 계열 재능이 상당하군."
아라 자신도 놀란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검은 안개를 뿜어내던 그 손이,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얌전히 놓여 있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 한구석에서 뭉클하게 피어올랐는데, 그것은 자부심이라기보다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 세계에서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을 실감한 데서 오는 얕은 위안 같았다. 조롱하던 시선들이 서서히 거두어지는 것을 느끼며, 아라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어보려 했지만,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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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나고 복도를 걷던 중, 한혜미가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아라 님, 오늘 완전 멋있었어요. 그 애들 표정 봤어요? 완전 얼음이 됐던데요."
"그, 그런가……?" 아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완전요! 저 그때 진짜 웃음 참느라 힘들었잖아요. 특히 아까 비웃던 그 애, 완전 얼굴 빨개져서 도망가던 거 보셨어요?"
"그, 그건 못 봤는데……." 아라가 눈을 크게 뜨자 한혜미가 재빠르게 그 학생의 표정을 흉내 내며 웃음을 자아냈다. 복도를 걸으며 나누는 이런 소소한 대화가, 아라에겐 낯선 세계에서 찾은 작은 안식처처럼 느껴졌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낯선 웅성거림이 들려왔고, 두 사람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화려한 금장식이 달린 예복을 입은 왕태자 이시우가 시종들을 이끌고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 소리에 지나가던 학생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길을 텄고, 복도의 웅성거림이 잦아드는 대신 팽팽한 정적이 대신 들어찼다.
그의 시선이 곧장 아라에게 꽂혔는데, 그 눈빛에는 반가움과 소유욕이 반씩 뒤섞여 있는 것 같아, 아라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옆에 서 있던 한혜미도 그 시선의 무게를 감지한 듯, 슬쩍 아라의 팔을 붙잡으며 몸을 굳혔다.
이시우의 걸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