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애완 성녀의 각성

4화

며칠 후, 아라의 책상 위 필기구가 하나둘씩 사라지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정신이 없어서 어딘가에 흘리고 온 줄로만 알았다. 마법 이론 수업에 쓰던 깃펜 하나가 안 보이는가 싶더니, 다음 날엔 손에 익은 잉크병이 통째로 사라졌고, 그다음 날엔 아끼던 지우개용 스펀지까지 자취를 감췄다. 아라는 처음엔 자신을 탓했다. 원래도 정신없이 사는 인생이었으니, 뭐, 하나쯤 잃어버리는 것도 그럴 수 있지, 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던 것이다. 그러나 잉크병이 뚜껑도 닫히지 않은 채 책상 서랍 안에서 옆으로 엎어져 있었을 때, 그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교재의 한가운데 페이지가 정확히 찢겨 사라져 있었을 때, 아라는 더 이상 이것을 우연이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이거…… 누가 그런 걸까요……." 아라가 찢긴 페이지의 매끈한 단면을 손끝으로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종잇조각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의 악의가 그대로 형체를 갖춘 것 같아서, 손이 절로 떨렸다. 옆에서 함께 흔적을 살피던 한혜미가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넘기는 그녀의 표정에는 짜증과 확신이 반씩 섞여 있었다. "뻔하죠. 요즘 백서린 영애 쪽 시녀들이 자꾸 아라 님 주변을 얼쩡거린다고 하던데요. 저번엔 도서관에서도 봤다니까요. 뭘 그렇게 뒤지고 다니는지."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요……." 아라가 애써 부정하려 했지만, 목소리 끝이 힘없이 갈라졌다. "몰라서 그래요? 여긴 왕궁이에요. 여기 사람들한텐 자존심이 목숨보다 중해요." 한혜미가 딱딱하게 잘라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아라는 그날 오후 복도에서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회랑을 지나던 중, 세로로 곱게 말린 금발을 늘어뜨린 소녀가 서너 명의 무리를 이끌고 아라의 앞을 정면으로 가로막았다. 옷차림 하나하나가 값비싼 장식으로 마무리된, 어느 초상화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한 소녀였는데, 그 눈빛에 담긴 경멸만큼은 화려한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서늘하도록 뚜렷했다. "한도희예요." 소녀가 도발적으로 이름을 밝혔다. "기억해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미천한 것." "제, 제가 뭘 잘못했나요……." 아라가 당황해서 되물었지만, 한도희는 그 물음을 코웃음으로 받아쳤다. "잘못? 태자님의 눈길을 훔친 것 자체가 잘못이지. 평민 출신 고아 따위가 감히 어디서." 한도희가 부채로 입가를 살짝 가리며 나머지 시녀들을 향해 눈짓을 보냈고, 그러자 뒤에 있던 소녀들이 낮게 키득거렸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여긴 당신이 있던 그 빈민가가 아니니까." 빈민가라는 말에 아라의 가슴 깊은 곳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 단어가 불러오는 기억들이―축축한 골목, 배를 채우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던 시간들, 애써 눌러두었던 과거의 조각들이―순간적으로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아라는 이를 악물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쥐며 그 감정을 삼켜냈다. 여기서 눈물을 보이는 순간, 이 소녀에게 승리감을 안겨주는 꼴이 될 것이 뻔했다. "그, 그런 건……." 뭐라 항변하려 했지만, 말이 목 안에서 흩어져 버렸다. 한도희는 그런 아라의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리고는, 아라의 어깨를 툭 치듯 스쳐 지나갔다. 향수 냄새가 짙게 남았다. 한혜미가 그 상황을 뒤늦게 목격하고 달려와 아라의 팔을 붙잡았다. "저런 애들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 저렇게 다들 앞뒤 안 가리고 험한 말 하는 애들이니까요. 백서린 영애 곁에서 몇 년 굴렀다고 저것도 배운 거예요, 자기도 원래는 별 볼 일 없던……." 한혜미가 위로하듯 빠르게 말을 이어 붙였지만, 아라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 * * 그날 저녁, 다섯 시 보고 시간에 아라는 유독 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오늘 배운 마법 이론이 어쩌고, 오늘 식당 메뉴가 어쩌고 조잘거렸을 텐데, 오늘은 그저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시우가 그것을 눈치채고, 서류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아, 아니요, 별일 아니에요……." 아라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지만, 이시우는 그 표정에서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안개 낀 숲처럼 깊은 그의 눈동자가 아라를 한동안 응시했다. "한도희인가." 이시우가 낮게 물었는데, 그 말에 아라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 어떻게……." "백서린 영애의 심복이지. 요즘 자네 근처를 자꾸 얼쩡거린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시우가 무심한 듯 말했지만, 그 눈빛에 서린 서늘함이 아라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찢어진 교재도, 엎어진 잉크병도, 전부 보고받았다." "그, 그것까지……." 아라는 자신의 사소한 일상까지 감시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러니 처리해야겠군." "아, 아니요, 그,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라가 급히 손을 저으며 만류했다. 이런 식으로 왕태자가 개입하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왕태자의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백서린과 그 측근들의 질투를 부추기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이시우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필요 없다니." 이시우가 미간을 좁혔다. "내 성녀를 괴롭히는 자를 방치할 수는 없다." 그 말에 아라는 답답함이 목까지 차올랐다. 내 성녀라는 그 표현이, 처음엔 어딘가 든든하게 느껴졌던 그 표현이, 이제는 자신을 옥죄는 족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보호받는다는 것이, 실은 소유당하고 있다는 것과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 아라는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저는 그저……" 아라가 말을 고르다가, 결국 삼켜버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왕태자에게 대놓고 항의할 용기는 아직 나지 않았다. 잉크값이나 찢어진 종이값 정도는 자기 돈으로 채워 넣으면 그만인 일이었지만, 이 사람의 방식대로 문제가 처리되면 뒷감당은 결국 자신이 해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짙었다. * * * 정원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저 멀리 회랑 그늘 아래, 백서린이 팔짱을 끼고 서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세필로 그린 듯 정교한 그 얼굴에는 표정이 거의 없었지만, 그 시선만큼은 마치 칼날처럼 아라의 등을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아라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다음 날 아침, 아라는 계단을 오르며 왠지 모를 불안감에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유난히 가까이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뒤돌아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계단 끝에서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바람 소리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라는 애써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 서늘한 기척은, 계단을 다 오를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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