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계약서에 서명한 지 사흘 만에, 나는 청하촌을 떠나 왕성으로 향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검 한 자루와 낡은 배낭이 전부였다.
배낭 안에는 갈아입을 옷 두 벌과 말린 육포, 그리고 어머니가 물려주신 낡은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청하촌에서 삼 년을 살았는데, 떠나는 짐이 이렇게 가벼울 줄은 몰랐다.
'인생 참 가볍네.'
마을 어귀에서 몇몇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줬다.
검녀가 결국 왕성으로 팔려 간다더라, 하는 소문이 벌써 퍼진 모양이었다.
그러게, 팔려 가는 거 맞는데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었다.
한도희는 마차 대신 말을 몰고 나타났다.
준기사가 되었으니 이제 이 여자와 한 조로 움직이게 된다.
계약서에 서명하던 날, 그녀가 내 후견인이자 감독관이 되기로 했다는 걸 다시 곱씹었다.
말 위에 앉은 그녀의 모습이 새삼 낯설게 보였다.
갑주를 입지 않은 평상복 차림인데도, 등이 곧고 시선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타시겠습니까."
"제가 왜 당신 말에 타야 되죠. 저도 발이 있는데요."
"왕성까지는 사흘 거리입니다. 걸어가시겠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말투는 정중한데 눈빛은 딱딱했다.
'저럴 거면 그냥 마차를 준비하지, 왜 말 한 마리로.'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보면 괜히 더 없어 보일 것 같아서 참았다.
결국 말에 탔다.
앞자리에 그녀가, 뒷자리에 내가 앉는 구도였다.
등에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가깝다. 너무 가까워.'
말이 걸음을 뗄 때마다 안장이 흔들렸고, 그때마다 내 무릎이 그녀의 허리에 부딪혔다.
민망해서 몸을 뒤로 젖혔더니, 이번엔 뒤로 넘어갈 것 같아서 다시 앞으로 붙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걸어간다고 우겼어야 했다.
"불편하시면 조금 떨어져도 됩니다."
"됐어요."
나는 일부러 등을 곧게 폈다.
그녀와 몸이 닿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말이 흔들릴 때마다 소용이 없었다.
십 분쯤 지나자 그냥 포기하고 그녀의 등에 이마를 살짝 기댔다.
어차피 사흘을 이렇게 가야 하는데, 자존심 세워봐야 몸만 고생이었다.
왕성으로 가는 길, 그녀는 준기사 제도의 세부 사항을 설명했다.
숙소는 기사단 별관에 배정되고, 임무는 정기적으로 배당된다고 했다.
식사는 단원들과 함께하되, 훈련장 사용 시간은 정식 기사보다 늦은 시간대로 배정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만 신분은 정식 기사가 아니기 때문에, 기사단 내에서 무시당할 가능성이 있다고도 했다.
"정식 기사가 되려면 뭐가 필요한데요."
"임무 성과와 시합 승률, 그리고 상급 기사의 추천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추천해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제 추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공개된 자리에서 인정받으셔야 합니다."
그 말투가 어쩐지 딱 잘라 선을 긋는 것처럼 들려서, 나는 괜히 입술을 삐죽였다.
"특히 3기사단 부대장, 최윤겸이라는 자는 조심하십시오."
"왜요."
"준기사 제도 자체를 싫어합니다. 자격 없는 사람들이 기사단에 들어온다고 여기죠."
'자격 없는 사람이라니, 딱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네.'
"그 사람, 원래 그렇게 꼬여있는 성격이에요?"
"정식 기사 시험을 세 번 떨어진 후에 뒷문으로 들어온 자들에게 유독 예민합니다."
"본인은 정문으로 들어왔나 보죠."
"본인은 정문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럼 뭐, 나름 이유는 있네. 그래도 짜증나긴 하지만.'
"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저는 신경 안 써요."
"신경 안 쓰시는 게 좋습니다. 다만 공개된 자리에서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증명이요."
"기사단 내부 시합, 혹은 실전 임무에서요."
그 말에 나는 오히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런 거라면 문제없지.'
검을 쓰는 일이라면, 자신 있었다.
청하촌에서 나를 두고 검녀라 부르던 사람들 중 절반은 조롱이었고, 절반은 두려움이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언젠가 그 별명이 진짜 실력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자신 있으시면 다행이군요."
"당신도 좀 걱정되는 표정 좀 지어봐요. 반응이 너무 무덤덤해서 재미없네."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 짧은 대답에 왜인지 마음이 살짝 풀렸다.
'뭐야, 진심이야?'
밤이 되어 첫 야영지에 도착했다.
작은 시냇가 옆,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물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렸고, 풀벌레 소리가 그 사이를 채웠다.
한도희가 불을 피우는 동안, 나는 담요를 펼쳤다.
불붙이는 손이 익숙했다.
마른 나뭇가지를 쌓는 순서, 부싯돌을 긁는 각도까지 낭비하는 동작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것까지 잘하면 뭔가 반칙 아닌가.'
불이 타올랐고, 주황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얇게 번졌다.
나는 그 얼굴을 잠깐 보다가, 담요 끝자락만 괜히 손끝으로 만졌다.
"오늘 밤부터인가요."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
계약 조건을 실행하는 첫날인지 확인해야 했다.
목소리는 태연했는데, 손끝은 담요를 꽉 쥐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멈추고 나를 봤다.
불빛 때문인지, 눈동자가 평소보다 짙어 보였다.
"원하지 않으시면 미룰 수 있습니다."
"조건이니까 지켜야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졌다.
'왜 이렇게 긴장이 돼.'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는 이렇게까지 떨리지 않았는데.
막상 그 조건이 눈앞에 닥치니,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한도희가 다가왔다.
불빛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옷깃에서 옅은 쇠붙이 냄새와 마른풀 냄새가 섞여 났다.
"긴장하셨습니까."
"아니요."
거짓말이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기분이었는데 아니라고 말하는 내가 좀 웃겼다.
그녀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차가운 손끝이었는데, 이상하게 뜨겁게 느껴졌다.
손바닥 위로 굳은살이 살짝 스쳤다. 검을 오래 쓴 사람의 손이었다.
"멈추길 원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알겠어요."
입술이 닿기 직전, 나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확인했다.
"이거, 진심이에요? 아니면 그냥 조건이에요?"
그녀는 대답 대신 입을 맞췄다.
대답을 피한 건지, 대답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애매함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밤이 깊어질수록, 계약이라는 단어는 점점 희미해졌다.
그리고 그만큼, 되돌릴 수 없다는 확신이 짙어졌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그녀보다 먼저 눈을 떴다.
타고 있던 불씨는 이미 재만 남아 있었다.
새벽 공기가 차가워서, 나는 담요를 목까지 끌어올리며 몸을 웅크렸다.
옆을 보니 그녀는 아직 등을 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저렇게 자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사람 같아서, 평소의 딱딱한 말투가 다 연기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갑주 옆에 놓인 서류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뭐지.'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준기사 명단이었다.
낯익은 이름들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나처럼 이번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 이름이었다.
내 이름 옆에 작은 표시가 하나 붙어 있었다.
다른 이름들에는 없는 표시였다. 붉은 잉크로 그린, 작은 세모 모양이었다.
'저게 뭘까. 불량품 도장 같은 건가.'
괜히 불길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다른 이름 옆에는 별표도 있고 동그라미도 있었는데, 유독 내 이름 옆만 저 세모였다.
서류를 조금 더 넘겨보려는데, 종이 뒤편에 작은 글씨로 뭔가 더 적혀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려는 순간, 한도희가 눈을 떴다.
서류를 황급히 감추는 그녀의 손이, 평소와 다르게 서둘렀다.
평소라면 뭘 물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대답하던 사람이, 지금은 시선을 피했다.
"그거 뭐예요."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면 그렇게 안 감추죠."
"…출발 준비하겠습니다."
말을 돌리는 솜씨가 어설퍼서 더 의심스러웠다.
'저 표시, 뭔가 숨기고 있는 거네.'
계약서에 서명할 때도 이런 표정은 안 지었는데.
나는 더 캐물으려다가, 아침 공기가 너무 차가워서 일단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왕성에 도착하면 알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왕성이 가까워질수록, 내가 발을 들인 이 세계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예감이 짙어졌다.
말 위에 다시 오르면서, 나는 그녀의 등을 슬쩍 노려봤다.
저 등 뒤에 숨긴 서류에, 대체 뭐가 더 적혀 있을까.
그 세모 표시가 자꾸만 눈앞에서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