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 몸이 조건이라고?

4화

사당에서 돌아온 뒤, 나는 사흘 내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천장 대신 그날의 훈련장이 떠올랐다. 몸을 뒤척이다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검을 쥐었다. 검을 손에서 놓지 않고 마당을 서성이는 버릇이 다시 생겼다. 삼 년 전, 기사단에서 쫓겨난 직후에나 하던 짓이었다. '또 시작이네.' 검 손잡이의 감촉이 익숙했다. 손에 익은 무게, 손에 익은 균형. 그런데 마음은 하나도 익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이 자꾸 되풀이됐다. 마치 낡은 필름을 억지로 다시 돌리는 것처럼, 똑같은 장면이 눈앞에서 반복됐다. 대현국 제1기사단, 그때 나는 스물이었다. 훈련장의 흙먼지, 새벽 점호의 냉기, 선배 기사들의 거친 손짓까지도 또렷하게 떠올랐다. 같은 소대의 여성 기사, 유하영과 가까웠다. 가깝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녀와 나는 서로를 원했고, 그걸 숨기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처음엔 그냥 검을 나눠 쓰는 사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의 숨소리까지 알게 됐다. 훈련이 끝난 밤, 둘이서만 몰래 만나 나눈 대화들, 손끝이 스칠 때마다 못 본 척 넘겼던 순간들. 그때는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순진했지만. 어느 날, 훈련장 뒤편에서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다른 기사가 목격했다.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하필 그 자리에 있던 게 입 가벼운 걸로 유명한 삼조 기사였다는 것도, 그가 우리를 보고 짓던 그 웃음도. 소문은 하루 만에 기사단 전체에 퍼졌다. '여자끼리 붙어먹는 검녀'라는 별명이 그날 붙었다. 처음엔 웃어넘기려 했다. 그런 말 몇 마디에 무너질 만큼 약하게 살아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별명은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식당에서도, 훈련장에서도, 심지어 지휘부 앞에서 인사를 올릴 때도. 지휘부는 곤란해했다. 대현국 군율에 동성 간 관계를 금하는 조항은 없었지만, 관례상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관례"라는 그 말이 그렇게 편리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법에 없는 죄를, 사람들은 관례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냈다. 결국 나만 방출됐다. 유하영은 남았다. 그녀의 가문이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출 통지를 받던 날, 나는 그녀의 얼굴을 봤다. 정확히는, 보려고 했다. '그때 그 년, 나 방출되는 날 눈도 안 마주쳤지.' 지휘부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던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나를 볼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미안한 표정 하나쯤은 지을 거라고. 그런데 유하영은 고개를 숙인 채 그냥 지나갔다. 마치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생각할수록 헛웃음이 났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게, 결국 나 혼자만의 대가였다. 그 뒤로 나는 사람에게 마음 주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몸은 원해도 마음은 주지 않는다, 그게 삼 년 동안 지켜온 원칙이었다. 누구를 만나든, 누구와 몸을 섞든, 마음까지 내주는 일은 다시 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되새겼다. 그런데 한도희는. '저 여자는 그냥 몸만 원하는 게 아니잖아.' 존경한다고 했다. 실력을 안다고 했다. 그리고 원한다고 했다. 순서가 이상했다. 보통은 원한다는 말이 먼저 나오고, 존경한다는 말이 나중에 붙는 법인데. 그 순서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처음엔 그냥 말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계약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수사적인 배치라고. '혹시 저 여자, 진심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헛웃음이 나왔다. '진심이든 아니든, 조건이 조건이잖아. 몸을 팔라는 거잖아, 결국.'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른 계산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준기사가 되면 정식 기사로 복귀할 길이 열린다. 명예도 회복할 수 있다. 유하영이, 그리고 나를 쫓아낸 인간들이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지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 앞에 다시 설 수도 있다. 내가 여전히 검을 놓지 않았다는 걸, 그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치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복수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지만.' 적어도 이서하가 검녀라는 이유로 쫓겨난 게 억울했다는 걸, 증명은 하고 싶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마당을 쓸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가벼운, 그러나 일정한 걸음. 한도희였다. 예상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빗자루질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침 햇살이 그녀의 등 뒤에서 비껴 들어와, 표정을 읽기가 애매했다. "답을 주시겠습니까." 그녀가 물었다. 표정에서 긴장이 살짝 엿보였다. '저 여자도 긴장은 하는구나.' 늘 여유롭던 사람이 손끝을 살짝 오므리고 있었다. 그 작은 움직임 하나가 이상하게 통쾌했다. 나는 빗자루를 내려놓고 그녀를 마주 봤다. 마당의 흙바닥, 아직 마르지 않은 새벽 이슬 냄새, 그리고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 셋 걸음쯤 되는 그 거리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조건 하나만 더 걸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이건 계약이지, 애정이 아니에요. 마음 같은 거 요구하지 마세요." 말을 내뱉는 순간, 나는 이게 나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상대에게 거는 조건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거는 못이었다. 한도희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너무 순순한 대답이라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저렇게 쉽게 받아들인다고?' 보통 이런 조건을 걸면 한 번쯤은 되묻거나, 억울한 표정을 짓거나, 적어도 눈썹을 찡그리기라도 하는 법이다. 그런데 한도희는 그냥 받아들였다. 마치 이미 예상하고 있던 답이라는 듯이. "그리고 하나 더요." "네." "제가 준기사로 인정받는 날, 이 관계는 재검토합니다." 내 나름으로는 최후의 방어선을 그은 셈이었다. 이 계약에 끝이 있다는 걸, 나 자신에게 확인시켜 두고 싶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옅게 웃었다. "좋습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뭔가, 이미 자신이 이겼다는 걸 아는 사람의 웃음 같았다. 그 웃음을 보면서 나는 잠깐 후회했다. 조건을 하나 더, 더 얹었어야 했나. 아니면 처음부터 이 자리에 오지 말았어야 했나. "그럼." 나는 검을 챙기며 말했다. "준기사, 하겠습니다." 그 순간, 마당의 바람이 유난히 서늘하게 느껴졌다. 멀리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소리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한도희는 아무 말 없이 작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계약서였다. 받아 든 종이는 생각보다 두꺼웠다. 종이 위에는 이미 몇 줄의 조항이 정갈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마치 오늘 아침에 급하게 쓴 게 아니라, 며칠 전부터 준비해 둔 것처럼. '벌써 다 준비해 뒀네.' 계약서 맨 아래, 서명할 자리만 비어 있었다. 그 빈자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정확한 위치에. 손끝이 살짝 떨렸다. 서명을 하는 손이 아니라, 마음이 떨리는 거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붓을 쥐고도 한참을 종이 위에 손을 얹지 못했다. 한도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나를 기다렸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지금 서명하면, 되돌릴 수 없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손은 이미 붓을 종이로 가져가고 있었다. 서하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붓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 한도희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걸 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봤다. '저 여자, 방금 그 표정 뭐지.' 이겼다는 웃음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스쳐 지나간 얼굴. 그게 뭔지 알아낼 틈도 없이, 나는 이미 서명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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