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 몸이 조건이라고?

2화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잠을 설쳤다.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한도희라는 이름이 자꾸 머릿속을 헤집었다. '한도희. 한도희. 한도희.' 이름 세 글자를 되뇌다 보니 웃겼다. 무슨 부적도 아니고, 자꾸 되뇌면 뭐가 나오나. '준기사 제도'라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들어본 적도 없는 단어인데, 자꾸 신경을 긁었다. 이불을 걷어차고 다시 눕고, 또 걷어차고 다시 눕고. 그러다 새벽 어스름이 올 때쯤, 결심했다. '모르면 알아봐야지. 이게 성격이야.' 다음 날, 나는 일단 정보상 노인네를 찾아갔다. 청하촌 정보상 곽 노인은 촌구석에 앉아서도 왕성의 소식을 제일 빨리 아는 인간이었다. 이 좁은 마을 안에서 유일하게 신문 대신 사람 입으로 정보를 파는 인간. 돈 몇 푼만 쥐여주면 왕성 안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술술 뱉어내는, 알고 보면 꽤 위험한 노인네였다. '이 인간한테 물으면 얼추 나오겠지.' 곽 노인의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가자 익숙한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이구, 이게 누구야. 이서하 아니야?" "준기사 제도, 그거 좀 물어보려고요." 용건부터 딱 잘라 말했다. 시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준기사 제도? 그거 알지, 요즘 왕성에서 난리라며." 곽 노인이 곰방대를 물며 말했다. "뭔 난리요." "기사단 인력이 텅 비었다는 거야. 몇 년 전 국경 전투에서 기사들이 대거 죽었잖나." 기억났다. 나도 그 전투에 있었으니까. 다만 그때는 정식 기사가 아니었다. 검을 잘 쓰는 죄로 잠시 소집됐다가, 끝나자마자 다시 방출됐던 신세였다. 그때 흙먼지 냄새, 피 냄새, 그리고 전투가 끝난 뒤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리던 상관들의 뒷모습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도 이용하고 버렸지, 저 나라는.' 곽 노인은 곰방대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인력을 급하게 메꾸려고 만든 제도가 준기사야. 정식 기사만큼 인정은 못 받지만, 대신 조건이 헐렁하지. 신분도 안 따지고, 과거 경력도 안 따진다더군." "그럼 아무나 되겠네요." "아무나는 아니지. 실력은 확실히 봐. 그것도 아주 빡빡하게." '그럼 왜 나야.' 실력만 본다면, 청하촌 근방에서 나보다 검을 잘 쓰는 인간은 없었다. 동네 잔치에서 벌어진 팔씨름 대회도 아니고, 검술 대회에 나가면 매번 상금을 싹쓸이했으니까. 하지만 대현국 기사단 전체를 놓고 보면 나 정도 실력은 널려 있을 거였다. 왕성에는 어릴 때부터 정식으로 검을 배운 귀족 자제들이 우글거린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하물며 나는 추방된 전력이 있다. 소행 불량. 그 딱지가 아직도 붙어 있을 텐데. "그런데 왜 하필 나한테 왔을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곽 노인이 곰방대를 빼며 나를 흘겨봤다. 그 눈빛이 마치 '이 답답한 것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모르는 척하는 거냐, 정말 모르는 거냐." "뭘요." "자네 그 실력 아까워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어. 자네가 나갈 때 반대한 기사들도 꽤 있었다고." 금시초문이었다. '누가 나 나갈 때 반대를 했다고?' 숨이 턱 막혔다. 그런 얘기는 살면서 처음 들었다. 그때 기사단에서 내가 쫓겨난 이유는 명확했다. 동료 기사와의 관계 문제였다. 정확히는, 내가 여성 기사와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 시절 대현국 기사단은 그런 관계를 용납하지 않았다. '용납 안 할 거면 처음부터 신경도 쓰지 말지.' 덕분에 '검녀'라는 별명과 '소행 불량'이라는 낙인을 동시에 얻고 쫓겨났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뒤틀린다. 사랑한 게 죄였나. 아니, 걸린 게 죄였지. 곽 노인은 곰방대 연기를 뿜으며 덧붙였다. "들리는 말로는, 요즘 그 준기사 제도가 좀 이상하게 운영된다더라." "이상하게요?" "제도 취지는 인력 보충인데, 실제로는 특정 기사들이 개인적으로 사람을 데려온다는 거지. 마치 뭐랄까, 계약직 시종을 들이듯이." 등골이 서늘해졌다. '계약직 시종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머릿속으로 온갖 흉흉한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 잡는 이상한 계약이라도 있는 건가. "그 한도희라는 기사, 알아요?" 노인이 잠깐 침묵했다. 나는 그 침묵조차 답이 될까 싶어 침을 삼켰다. "들어봤지. 젊은 나이에 벌써 3기사단 정예로 뽑힌 인재라던데. 성격도 좋고 실력도 확실하다더군. 근데." 노인이 말을 멈추고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근데 뭔데요." "소문에는, 그 여자가 준기사를 들일 때마다 조건이 아주 특이하다더라." '특이하다는 게 뭔데.' 물어보려 했지만 곽 노인은 더 이상 아는 게 없다며 곰방대를 도로 물었다. 몇 번 더 캐물어봤지만 노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럴 땐 아무리 돈을 흔들어도 안 통한다. '진짜 딱 여기까지구나.' 가게 문을 닫고 나오는데, 마을 골목 사이로 늦은 오후 햇살이 길게 늘어졌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었지만, 마음은 전혀 선선하지 않았다. '특이한 조건이라니. 뭘 상상해도 좋은 쪽은 아니겠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을 입구에 이미 그녀가 서 있었다. 어제와 똑같은 자세, 똑같은 시간. 마치 시계처럼 정확했다. '와, 진짜 또 왔네.' 한도희는 등을 곧게 펴고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단 정복 위로 걸친 외투 끝자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여자였다. 저런 게 왕성 정예 기사라는 건가. "이서하 님." "……조건이라는 거, 오늘 말해준다고 했죠." "네."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각오를 다지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 등에 힘이 들어갔다. 평소 같으면 성가시다고 대충 흘려들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럴 수가 없었다. '저 표정, 뭔가 심상치 않은데.' 한도희의 눈빛은 어제와 달랐다. 어제는 정중하고 담담한 눈이었는데, 오늘은 뭔가 결의에 찬 느낌이 감돌았다. 마치 지금부터 할 말이 자기 인생을 걸 만한 일이라는 듯이. "오늘은 자리를 옮겨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디로요." "조용한 곳이어야 합니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어제까지는 그냥 성가신 손님이었는데, 오늘은 좀 다른 느낌이었다. '조용한 곳에서 할 말이라니.' 머릿속으로 곽 노인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조건이 특이하다는 말. 계약직 시종을 들이듯이 준기사를 데려온다는 말도. 이 여자, 3기사단 정예에 성격도 실력도 확실하다는 여자가, 대체 무슨 조건을 걸려고 이렇게까지 신중하게 자리를 옮기려는 걸까. 왠지, 그 이유를 곧 알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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