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다섯 살, 도둑의 눈

1화

새벽빛이 창호지를 뚫고 들어왔다. 이안은 눈을 떴다. 정확히는, 김도윤이었던 무언가가 눈을 떴다. 다섯 해 전, 그는 이 몸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태어난 순간부터 전생의 기억을 온전히 지니고 있었다. 서른두 해를 살았던 직장인 김도윤의 기억이었다. '오늘도 똑같은 천장이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천장의 나뭇결까지 눈에 익었다. 다섯 해 동안 매일 아침 같은 자리에서 같은 무늬를 보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회사 사무실 천장의 형광등을 세던 버릇이 어느새 서까래를 세는 버릇으로 바뀌어 있었다. '적응력 하나는 여전하군.'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손, 작은 발. 다섯 살 아이의 몸은 여전히 낯설었으나 익숙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몸이 작다는 것과 정신이 어리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굽혔다 펴보았다. 관절이 뻣뻣했다. 다섯 살배기의 몸은 아직 근육이라 할 것도 없었으나, 그 안에 든 정신만은 서른두 해를 넘게 굴러먹은 것이었다. 그 괴리감이 처음엔 우습다가, 지금은 그저 당연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 부엌에서 그릇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한서연이 아침을 짓고 있었다. 금발에 벽안, 이 청림촌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이국적인 얼굴이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청림촌은 원래 이방인들이 흘러들어와 자리잡은 변경 마을이었고, 그런 내력 덕에 낯선 생김새에 대한 텃세가 유독 적었다. "이안아, 일어났니." 그녀의 목소리엔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네, 어머니." 이안이 답했다. 또박또박한 말투였다. 다섯 살배기치고는 지나치게 정돈된 어투였으나, 한서연은 그것을 그저 아들이 똘똘하다는 증거로만 여겼다. "오늘은 죽이란다. 어제 밭에서 캔 감자가 좋더구나." 한서연이 국자를 저으며 말했다. "잘 먹을게요." 이안이 답했다. 그녀가 국자를 놓고 아들의 얼굴을 살폈다. 다섯 살배기 아이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가 스칠 때가 있었으나, 그녀는 그것을 조숙함으로 넘겼다. 어미의 눈이란 그런 식으로 자식을 보아주는 법이었다. 마당으로 나가자 형 도현이 장작을 패고 있었다. 여덟 살이었으나 손놀림이 야무졌다. 도끼를 내려찍는 각도가 어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퍽- 장작 하나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이안아, 이거 옮기는 거 도와줄래." 도현이 말했다. "응, 형." 이안은 짐짓 어린애처럼 웃으며 장작 몇 개를 들었다. '형은 나이에 안 맞게 성실하단 말이지.' 이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도현은 마을 아이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명민하고 도덕적인 아이로 통했다. 다른 집 아이들이 아직 잠에서 덜 깨어 마루에서 뒹굴 시간에, 도현은 벌써 장작을 패고 우물물을 길어 나르곤 했다. "형은 힘들지 않아?" 이안이 물었다. "힘든 게 어딨어. 아버지도 밭에 나가시는데." 도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동생이 도와주니까 더 빠르네." 그 말에 이안은 그저 웃었다. 전생의 기억이 있는 자신과, 순수하게 이 삶만을 살아온 형의 대화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어긋났다가 다시 맞물렸다. 어긋나는 부분은 이안이 알아서 감췄고, 맞물리는 부분에서만 대화가 이어졌다. 아버지 이정호는 이미 밭에 나가 있었다. 검은 머리에 짙은 눈매, 그 역시 이국적인 용모였다. 먼발치에서도 그의 어깨가 유독 넓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청림촌 사람들 중에서도 힘으로는 첫째 둘째를 다투는 체격이었다. 밥상 앞에 앉았을 때, 이안은 습관처럼 눈을 감고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상태】 이름: 이안 레벨: 1 마력 순환: 3단계 스킬: 【도안(盜眼)】 - 조건 미달 (잠김) 그것은 게임의 상태창 같은 것이었다. 이안이 전생에서 즐겼던 모바일 게임들, 그리고 수없이 읽었던 이세계 전생물의 클리셰와 정확히 일치하는 형태였다. '처음엔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이안은 밥을 뜨며 속으로 웃었다. 다섯 해를 살아본 결과 이것은 명백한 현실이었다. 처음 그것을 봤을 때가 세 살 무렵이었다. 눈을 감고 명상하듯 내부를 들여다보면 눈앞에 글자들이 떠올랐다. 처음엔 환각이라 여겼다. 두 번, 세 번 반복해도 사라지지 않았을 때에야 이안은 그것이 이 세계의 실제 시스템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 그는 그렇게 회상했다. 【도안(盜眼)】이라는 스킬은 이름부터 심상치 않았다. 도둑질할 도, 눈 안. 훔쳐보는 눈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조건 미달이라는 문구가 늘 붙어 있었다. 대체 무슨 조건인지, 스킬창은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분명 마력을 시각적으로 인지하는 게 관련 있을 거야.' 이안은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마력 순환 단계가 오를 때마다 스킬의 설명 문구가 조금씩 변화했기 때문이다. 1단계에서는 그저 "조건 미달"이라는 세 글자뿐이었으나, 3단계에 접어든 지금은 그 아래 흐릿하게 "감각의 확장이 필요함"이라는 문구가 덧붙어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확장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독학으로 마력 순환에 성공한 것도, 순전히 전생의 지식 때문이었다. 명상하듯 몸속의 미세한 흐름을 느끼고 순환시키는 방법. 게임 속 설정이 실제로 작동하리라 믿었던 것은 도박이었으나, 결과는 성공이었다. 처음 순환을 느꼈던 밤, 이안은 잠도 이루지 못하고 몸속을 흐르는 미약한 기운을 몇 번이나 되짚어보았다. '이게 진짜라면, 이 세계엔 정말로 마력이라는 게 존재하는 거다.' 그날 이후로 그는 매일 밤 자기 전, 그리고 아침에 일어난 직후 반드시 순환을 반복했다. "이안, 밥 먹고 뭐 할 거니." 한서연이 물었다. "밭에 나가서 형 도와줄까 해요." 이안이 답했다. "그래, 착하기도 하지." 그녀가 웃으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 손길 아래, 이안의 속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 마을에서는 마력 시야까지 도달할 방법이 없어.'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청림촌은 외부와 단절된 산골 마을이었고, 마법이라는 것을 실제로 부리는 사람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을에서 가장 먼 곳을 다녀본 사람도 고작 옆 마을까지였고, 그곳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킬은 잠겨 있었고, 시험할 대상도 없었다. 결핍은 그렇게, 조용히 쌓여가고 있었다. 이안은 종종 밤하늘을 보며 저 너머 어딘가에는 분명 마력을 다루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게임에서 봤던 마법사, 소설에서 읽었던 술사들처럼. 하지만 그 짐작을 확인할 방법이 이 산골 마을 안에는 없었다. +++ 밥을 먹고 나서 이안은 마당에 나가 나무 막대기를 휘둘렀다. 검술 흉내였다. 휙- 휙- 막대기가 허공을 갈랐다. 자세는 어설펐다. 전생의 기억 속에도 검술이란 것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소설과 영화에서 본 동작들을 조합해 흉내 내는 수준이었다. 도현이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안이는 크면 검사가 되고 싶은가 보다." 도현이 말했다. "글쎄, 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이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형이 봐줄게. 자세가 좀 이상해." 도현이 다가와 이안의 팔을 잡아 각도를 고쳐주었다. 이안은 순순히 그 손길을 따랐다. '형한테 배운 검술이 나중에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나쁠 건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막대기를 휘둘렀다. 도현이 고쳐준 자세는 확실히 조금 더 안정적이었다. 마을 아이들 중 유일하게 아버지에게서 기본기를 배운 도현이었다. 그때였다. 마을 입구 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한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고 있었다. 옆 마을 김씨네 일꾼이었다. 옷자락이 온통 진흙투성이였고, 정강이에는 긁힌 상처가 벌겋게 나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신발 한쪽이 벗겨진 채였다. "촌장님! 촌장님 어디 계십니까!" 그가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빗장을 걸어둔 대문을 열어젖히는 소리, 부엌에서 뛰쳐나오는 발소리가 여기저기서 겹쳤다. 이정호도 밭일을 멈추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도현 역시 막대기를 든 이안의 손을 잡고 함께 마을 입구로 향했다. "무슨 일이오." 이정호가 물었다. "강가에서... 강가에서 사람이 죽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뭐라고." 누군가 외쳤다. "이무기입니다. 큰 이무기가 나타났어요."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누군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누군가는 벌써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촌장이 뒤늦게 달려나와 남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무기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자세히 말해보게." 촌장이 다급하게 물었다. "강가에서 물 길으러 나갔던 최씨가... 반 토막이 나서... 강물에 떠올랐습니다." 남자는 말을 잇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었다. 그 순간, 마당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이안은 나무 막대기를 손에 쥔 채,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이무기라니.' 그의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전생에서 읽었던 무협지와 판타지 소설 속 이무기들이 뒤섞여 떠올랐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였다. 이 평온했던 마을에, 처음으로 진짜 위협이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도현의 손이 이안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여덟 살, 아무리 명민하고 야무진 아이라도 사람이 반 토막이 났다는 말 앞에서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안아, 집으로 가자." 도현이 낮게 말했다. 이안은 형의 손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촌장과 남자를 향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이정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걱정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한, 낯선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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