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어둠 속에서 신을 조립하다

3화

미노타우로스의 뿔이 코앞에 있었다. 거대한 뿔의 곡선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짐승의 콧구멍에서 뿜어지는 뜨거운 숨결이 뺨에 닿았다. 흙과 피와 짐승의 냄새. 이도현은 눈을 감지 않았다. 몸이 굳어 있었다. 도망칠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다리는 이미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끝났다. 골격의 손가락이 완전히 감겼다. 그것은 이도현의 옆, 반쯤 어둠에 잠긴 자리에서 조용히 서 있던 인형이었다. 하얀 뼈로 이루어진 손. 그 손가락 마디마디가 관절을 세우며 접혔다.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온 동작처럼,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다음 순간, 그것이 움직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날렸다. 그 순간까지 골격이었던 것을 감싸고 있던 마력의 껍질이, 파도가 밀려오듯 순식간에 인간형의 외피로 뒤덮였다. 창백한 피부가 드러났다. 도자기처럼 흰 살결에 핏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고스로리풍 검은 드레스의 프릴이 펄럭였다. 그리고 인형처럼 무표정한 눈동자가 정면을 향했다. 그녀가 손을 뻗었다. 동작에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손가락이 뿔의 표면을 감쌌다. 각질로 이루어진 단단한 뿔이었다. 수많은 모험가들의 무기를 부러뜨린 그 뿔이, 그녀의 손안에서 마치 나뭇가지처럼 잡혔다. 돌진하던 거체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멈췄다. 수 톤에 달하는 근육과 뼈가, 관성을 무시하고 정지했다. 물리 법칙을 거스른 순간이었다. 이도현의 눈에는 그 장면이 슬로 모션처럼 느껴졌다. 동굴 전체가 침묵했다. 물방울이 어딘가에서 똑, 하고 떨어지는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도현은 숨을 쉬지 못했다. 가슴 속에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폐는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의 광경을 뇌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 하나가 뿔을 타고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마치 손끝으로 표면의 결을 확인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주먹이 쥐어졌다. 단 한 번. 주먹이 미노타우로스의 이마에 박혔다.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마치 산이 무너지는 소리 같았다. 공기가 진동했고, 이도현의 귀가 잠시 멍해졌다. 미노타우로스의 거체가 뒤로 튕겨 나가며 동굴 벽을 뚫고 그대로 파묻혔다. 돌가루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벽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중 몇 개가 이도현의 발 앞까지 굴러왔다. 침묵이 다시 내려앉았다. 남은 네 마리의 붉은 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도망친 것이었다. 방금까지 동굴을 가득 채웠던 짐승들의 숨소리, 발굽 소리, 위협하듯 낮게 울리던 그르렁거림. 그 모든 소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무너진 벽의 잔해와 흩날리는 돌가루뿐이었다. 이도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일어설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목격한 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죽음 직전의 환각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녀가 천천히 돌아섰다. 드레스 자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발걸음에는 소리가 없었다. 마치 바닥을 딛는 게 아니라 스치듯 움직이는 것 같았다. 무표정한 눈동자가 이도현을 향했다. 그 시선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두려움도, 흥분도, 만족감도 없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이 세상 무엇보다 확고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충성이었다. 혹은 그와 비슷한 어떤 것. "마스터."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인간의 목소리와 비슷했지만, 어딘가 미세하게 다른 울림이 섞여 있었다. "명령을." 이도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 존재가 대체 무엇인지, 그 모든 질문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름이."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이름을 지어줘야겠지." 그녀는 잠시 이도현을 응시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고, 무언가를 판단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은 마스터가 정하는 것입니다." 그 말투에는 어떤 감정의 굴곡도 없었다. 단순한 사실의 진술이었다. 이도현은 무너진 벽의 잔해를 잠시 바라봤다. 돌가루가 아직도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봤다. "일호." 그가 말했다. "내가 만든 첫 번째니까. 일호." 그녀는 잠시 그 이름을 곱씹는 듯했다. 정확히는, 곱씹는다는 표현이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짧은 정지가 있었다. "일호." 그녀가 반복했다. 발음은 정확했다. 억양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처음부터 그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명령을 받겠습니다, 마스터." 이도현이 일어서려는 순간, 무릎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한 번 휘청거렸다. 손을 짚으려던 찰나, 동굴 천장 구석에서 작은 마석 조각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빛이었다. 일정한 주기로 깜빡이는, 인위적인 빛. A랭크 던전에는 던전 관리국이 설치한 감시 마도구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몬스터 토벌 기록을 검증하고, 동시에 왕도 전역의 모험가 길드로 실시간 배송되는 장치였다. 그 사실을 아는 모험가는 많지 않았지만, 이도현은 예전에 우연히 관련 자료를 본 적이 있었다. 방금 그 장면이, 전부 배송됐다.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맨손으로 붙잡는 장면부터, 단 한 번의 주먹질로 거체를 벽에 파묻어버리는 장면까지. 그리고 그 인형이 자신을 "마스터"라 부르며 명령을 기다리는 장면까지. 전부. 이도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조금 곤란한데." 그가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방금 전의 충격과는 또 다른 종류의 긴장이 섞여 있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들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더 크게 자리 잡았다. 일호는 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서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도현은 마석 조각을 한 번 더 올려다봤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되돌릴 수 없었다. "일단." 그가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섰다. 무릎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냈다. "여기서 나가는 게 먼저야." 같은 시간, 던전 입구 근처의 후퇴로에서는 강태호의 파티가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좁은 통로였다. 벽에는 오래된 이끼가 붙어 있었고, 바닥은 습기로 미끄러웠다. 파티원들의 갑옷과 무기에서 아직도 전투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찢어진 로브, 이가 빠진 검날, 그리고 온몸에 튄 검붉은 피. "여기서 좀 쉬자." 강태호가 벽에 등을 기댔다. 그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방금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팀 전체가 소모한 마력과 체력은 상당했다. 유하린이 힐러 지팡이를 바닥에 세웠다. 지팡이 끝에 달린 마정석이 아직도 미약하게 빛나고 있었다. 회복 마법을 연달아 사용한 탓이었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인형사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을 꺼내면서도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마치 그 질문의 답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확인하기가 두려운 것 같았다. 강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통로 저편, 그들이 도망쳐 나온 방향을 잠시 바라봤다. 어둠 속에 잠긴 그 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죽었을 거야." 오정민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지팡이를 고쳐 쥐며 어깨를 으쓱했다. 표정에는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어차피 딜도 못 하는 놈이었어. 미노타우로스 다섯 마리를 상대로 뭘 하겠어." 유하린이 그를 쏘아봤다. "그래도." "그래도 뭐." 오정민이 되받아쳤다. "우리 다섯 명이 붙어도 감당 못 해서 도망친 거잖아. 걘 파티에 짐이었어. 처음부터." 강태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낀 채 통로 벽에 몸을 더 깊이 기댔다. 그때, 오정민의 손목에 찬 작은 마도구가 갑자기 진동했다. 길드 등록 모험가라면 누구나 지급받는 배송 수신기였다. "뭐야." 오정민이 화면을 들여다봤다. 액정에 표시된 문구를 확인한 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긴급 배송 알림." "뭔 내용인데." 강태호가 다가왔다. 유하린도 지팡이를 다시 손에 쥐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 속 영상이 재생됐다. 동굴, 붉은 눈, 그리고— 강태호의 눈이 커졌다. 검은 머리의 소녀가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맨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화면이 흔들리는 감시 마도구 특유의 낮은 해상도였지만, 그 장면만큼은 선명하게 잡혔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주먹질로 그 거체를 벽에 파묻어버리는 장면이 이어졌다. 돌가루가 화면 전체를 뒤덮었다. 영상 하단에 뜬 좌표. 칠흑의 미궁 10층. 그들이 방금 도망쳐 나온 그 구역이었다. "이거." 유하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팡이를 쥔 손이 다시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버린 곳이잖아." 강태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방금 전 상황들이 순식간에 재구성됐다. 다섯 마리의 미노타우로스. 파티가 전멸 위기에 몰렸던 순간. 인형사를 뒤에 남겨두고 도망치듯 빠져나온 결정. 그 모든 판단이 지금 이 화면 하나로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다. 영상 속에서 카메라가 살짝 흔들리며, 검은 머리 소녀 뒤로 한 남자의 뒷모습이 잡혔다. 등에 멘 낡은 공구 가방. 특유의 자세. 낯익은 실루엣이었다. 그 뒷모습을, 이 파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함께 던전에 들어온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았지만, 그 특유의 어색한 자세와 낡은 가방만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강태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저거." 그가 겨우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인형사잖아." 오정민의 손에서 마도구가 미끄러질 뻔했다. 그는 다시 손목을 붙잡고 화면을 확대했다. 영상은 이미 끝나가고 있었지만, 마지막 프레임에 잡힌 그 뒷모습만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 세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통로 안의 침묵이 방금 전 동굴의 침묵과 겹쳐지듯 무겁게 내려앉았다. 유하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저 여자는." 말이 끝을 맺지 못했다. 강태호는 화면을 다시 재생시켰다.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붙잡은 손. 단 한 번의 주먹질. 벽을 파고드는 거체. 그 모든 장면이 다시 흘러갔다. "저게." 그가 중얼거렸다. "저게 대체 뭐야."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던전 관리국으로, 그리고 왕도 전역의 모험가 길드로 이미 배송된 그 영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 수백 개의 화면 위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화면들 너머에서, 이제 막 새로운 종류의 시선들이 이도현이라는 이름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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