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현암 사제는 생각보다 젊었다.
백발이 섞인 짧은 머리, 온화한 인상, 그러나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승복 대신 걸친 회색 도포 자락이 서재 바닥에 스쳤다.
허리에 찬 목검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선우결 도련님이시군요.
현암이 먼저 인사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선우결이 답했다.
어떤 얘기를요.
산적 두목을 원거리 마법으로 처치했다는 소문이요.
둘 다 짧게 웃었다.
과장 좀 섞였겠죠.
선우결이 슬쩍 떠봤다.
그럴 리가요. 이 근방에서 그 얘기 안 들은 사람이 없습니다.
현암의 눈이 살짝 휘어졌다.
최인덕이 자리를 비키자 서재 안은 둘만 남았다.
책장 사이로 먼지 냄새가 은근히 퍼졌다.
현암이 검자루를 흘긋 봤다.
그 검,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선우결이 검을 건넸다.
현암의 손이 검자루에 닿는 순간,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거 어디서 얻으신 겁니까.
원래 집안에 있던 거라고 들었어요.
음.
현암이 눈을 감고 뭔가를 읽어내듯 검을 오래 들고 있었다.
손끝으로 검신을 천천히 훑었다.
날카로운 것 같은데, 서두르지 않는 손짓이었다.
선우결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가 좀 있어요?
마력 흐름이 특이합니다. 일반적인 마법검이 아닙니다.
현암이 검을 돌려주며 말했다.
일단, 상태창을 열어보신 적 있습니까.
상태창이요?
선우결의 머릿속에 게임 UI 같은 이미지가 스쳤다.
설마 진짜 그런 게 있어요?
마력을 다루는 자라면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보십시오.
말이 되나.
선우결은 속으로 되물었다.
이 세계 사람들은 다들 이런 걸 당연하게 아나.
일단 해보는 게 남는 거였다.
선우결은 눈을 감았다.
반신반의했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삐빅—
귀에 익은 전자음이 울렸다.
[상태 확인]
이름: 선우결
기초 레벨: 3
직업: 미확정 (조건 불충족)
마력: 12 / 12
스킬: 없음
선우결의 얼굴이 굳었다.
이게 뭐야.
미확정?
산적 두목을 검으로 갈라버렸는데 스킬이 없다고.
왜 그러십니까.
현암이 물었다.
선우결이 눈을 뜨며 상태창을 그대로 읽어줬다.
현암의 표정이 묘해졌다.
직업이 미확정인 건 드문 일입니다. 보통은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특정 조건을 채우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럼 스킬 없음은요.
어제 그 마법은 스킬이 아니라 검 자체의 힘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검 자체의 힘.
선우결이 그 말을 되뇌었다.
허탈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검만 쓸모 있다는 거잖아.
이러면 나는 그냥 검집 아니야.
속으로 욕이 나왔다.
현암이 손을 들어 검을 다시 가리켰다.
제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검엔 봉인된 힘이 있습니다. 그게 도련님과 공명한 것 같습니다.
공명이요.
어제 그 이상한 문구가 생각났다.
[???: 알 수 없는 마력 공명이 감지되었습니다.]
그거였구나.
선우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좀 맞아떨어지네.
한번 직접 시험해보시겠습니까.
현암이 정원 쪽을 가리켰다.
뒤뜰에 훈련용 표적이 있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란 말, 오늘 두 번째로 써먹는 셈이었다.
선우결은 검을 들고 뒤뜰로 나섰다.
뒤뜰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좁은 공간이었다.
바닥에는 마른 흙과 낙엽 몇 장.
표적은 낡은 나무 인형이었다.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는 걸 보니 오래 써온 물건이었다.
마력을 검에 흘려보내라, 현암의 조언이었다.
그게 다예요?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면 안 되나.
원래 이런 건 몸으로 익히는 겁니다.
편리한 대답이었다.
선우결은 손끝에 집중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한 번 더.
또 안 됐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표적 앞에서 검만 몇 번 휘저었다.
바람 가르는 소리만 났다.
뭐야, 어제는 되던 게 왜 지금은 안 돼.
선우결이 짜증을 삼켰다.
이러다 병신 되겠는데.
현암이 조언했다.
어제는 절박했습니다. 감정이 강하게 실렸을 겁니다.
지금 절박해지라는 거예요?
선우결이 되물었다.
비슷합니다.
어이없는 대답이었지만, 일단 해보기로 했다.
칼자루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선우결은 눈을 감고 어제 상황을 떠올렸다.
칼끝에 닿은 은발 소녀의 목, 흐르던 핏줄기, 그 절박함.
숨이 턱까지 차오르던 그 순간,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검이 다시 미세하게 떨렸다.
웅—
빛이 검날에 얽혔다. 어제보다 더 선명했다.
[스킬 확인: 프리즘 소드 (Lv.1)]
[사거리 확장, 관통 효과]
방금 뜬 문구가 이번엔 사라지지 않고 눈앞에 잠깐 고정됐다.
선우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름 붙었네.
이제 좀 사람 구실 하겠구먼.
검끝을 표적으로 향했다.
치이이이잉—
빛의 화살이 표적 인형을 그대로 뚫었다.
나무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파편 몇 개가 담장까지 튀어 부딪— 소리를 냈다.
현암의 눈이 커졌다.
이건 예상보다 강한데요.
선우결은 검을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미확정 직업이라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거면 됐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다.
현암이 다가와 부서진 표적을 살폈다.
파편 단면이 매끈합니다. 관통 효과가 확실합니다.
한 번만 더 써보고 싶은데요.
선우결이 검을 다시 고쳐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서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발소리가 자갈밭을 밟는 소리처럼 거칠었다.
도련님! 백작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무슨 일인데요.
선우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산적 잔당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번엔 청림마을이 아니라 저희 영지 코앞입니다!
선우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현암도 표정이 달라졌다.
몇이나 됩니까.
병사가 숨을 몰아쉬며 답했다.
정확한 숫자는 모릅니다. 다만 어제보다 규모가 크다고 합니다.
어제보다 크다고.
선우결이 그 말을 곱씹었다.
산적 두목 하나 잡았다고 끝난 게 아니었나.
이건 뭐, 사기당한 기분인데.
한 번 해봤으니 두 번째는 좀 낫겠지.
검을 고쳐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