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똑똑—
노크 소리가 방문을 두드렸다. 규칙적이고 절도 있는 리듬이었다.
도련님, 최인덕입니다.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선우결은 이불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들어와요.
문이 열렸다. 최인덕이 허리를 숙이며 들어섰다. 손에는 옷가지가 단정하게 걸려 있었다.
백작님께서 정식으로 저택 안내를 명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방 안에만 있던 거 아니었어요?
선우결이 물었다. 눈을 비비며 하품을 참는 표정이었다.
그동안은 요양 명목이었습니다. 오늘부터는 정식으로 백작가의 후계자로서 저택과 영지 사회를 익히셔야 합니다.
최인덕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단호했다. 반박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어조였다.
선우결은 침대에서 내려와 최인덕이 내민 옷을 받아 들었다. 짙은 남색 상의, 은실로 수놓은 소맷단. 무게가 제법 나갔다.
이거 갑옷보다 무거운 것 같은데.
도련님의 신분에 맞는 의복입니다.
최인덕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선우결은 옷을 갈아입으며 생각했다.
이게 이세계 귀족 사회 데뷔인가.
거울 앞에서 옷매를 정리하는 동안 최인덕이 몇 가지 예법을 짧게 설명했다. 인사할 때는 고개를 얼마나 숙여야 하는지, 시종을 대할 때 어떤 말투를 써야 하는지. 선우결은 절반쯤은 흘려들었다.
이거 다 외워야 돼요?
일단 몸에 익히시면 됩니다.
말이 쉽지.
선우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섰다. 복도는 길었다. 대리석 바닥에 발소리가 울렸다.
또각, 또각—
걸을 때마다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 눈에 들어왔다. 청하 백작가 조상들의 얼굴, 검을 든 조상, 성직자 옷을 입은 조상.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라탄 조상도 있었다.
다들 표정이 비슷하게 근엄했다.
이 중 누구도 내가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건 모르겠지.
선우결은 걸음을 늦추고 초상화 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자신과 닮은 이목구비는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초상화는 누구입니까.
3대 전 백작이십니다. 북방 전쟁에서 공을 세우셨습니다.
최인덕이 짧게 답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선우결도 뒤를 따랐다.
응접실을 지나자 넓은 홀이 나왔다. 천장이 높고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시종들이 지나가며 목례를 했다.
도련님.
하나같이 작은 목소리로 부르고 지나쳤다. 시선은 조심스러웠다. 이미 소문이 퍼진 듯했다.
산적 두목을 혼자 처치했다는 아들.
그 소문이 얼마나 부풀려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종들 눈빛에서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한 시종은 지나가면서 선우결을 힐끔 돌아봤다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저 반응은 뭐죠.
선우결이 최인덕에게 낮게 물었다.
관심입니다. 도련님께서 갑작스레 강해지셨다는 소문이 저택 안에 파다합니다.
강해진 게 아니라 원래 이랬던 건데.
선우결이 어깨를 으쓱했다. 최인덕은 대꾸 없이 걸음만 옮겼다.
최인덕이 걸음을 멈췄다.
이곳이 서재입니다. 백작님께서 자주 사용하십니다.
문을 열자 낡은 책 냄새가 밀려왔다.
벽면 가득 책장, 그 사이 낡은 지도, 오래된 무기 몇 점이 장식으로 걸려 있었다. 선우결은 안으로 들어서며 책장을 훑었다. 제목이 전부 낯선 문자였다.
이거 다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있긴 해요?
백작님께서 즐겨 읽으십니다.
최인덕이 담담하게 답했다.
선우결의 시선이 한쪽 벽에 걸린 빈 검집에 멈췄다. 가죽이 낡아 색이 바랬고, 금속 장식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저건 뭐죠.
원래 그 자리에 검이 있었는데, 도련님이 어릴 때부터 갖고 계셨습니다.
최인덕이 짧게 답했다.
허리춤의 클라우솔라스가 순간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선우결은 자신도 모르게 검자루로 손이 갔다.
이게 원래 여기 걸려 있던 거라고.
선우결은 검자루를 슬쩍 만졌다. 손끝이 미묘하게 저렸다. 짧은 전류 같은 감각이 손목까지 타고 올라왔다.
뭐야, 이거.
선우결이 손을 뗐다가 다시 잡았다. 저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누구의 검이었죠.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물건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자세한 건 백작님께 여쭤보셔야 할 겁니다.
최인덕의 태도가 살짝 조심스러워졌다. 뭔가 더 알면서 말을 아끼는 느낌이었다.
더 아는 거 있으면 말해줘도 되는데.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선우결은 최인덕의 표정을 살폈다. 흔들림 없는 얼굴, 그러나 눈동자가 잠깐 검집 쪽을 향했다가 돌아왔다.
거짓말은 아닌데 전부도 아니다.
됐다. 나중에 파보자.
선우결은 일단 넘겼다. 서재 안을 한 바퀴 더 돌아보며 지도 하나를 들춰봤다. 영지의 경계선이 붉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건 뭔데요.
영지 경계도입니다. 최근에 손보신 흔적이 있습니다.
최인덕이 지도를 다시 접어 원래 자리에 놓았다. 선우결은 더 묻지 않고 서재를 나섰다.
서재를 나오자 정원이 보였다. 잘 손질된 나무들, 분수, 그 옆에서 훈련하는 견습 기사들. 나무 검이 부딪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탁, 탁—
어제 그 견습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검을 휘두르다 선우결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도련님, 오늘부터 저택 견학이십니까.
그런 것 같은데요.
선우결이 어깨를 으쓱했다.
견습 기사가 검을 옆구리에 끼고 다가왔다. 목소리를 낮췄다.
어제 일 때문에 다들 도련님 얘기만 합니다. 산적 두목을 원거리 마법으로 처치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사실이긴 한데, 저도 어떻게 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선우결이 솔직하게 답했다.
견습 기사의 눈이 커졌다.
그 말이 더 무서운데요.
둘 다 어색하게 웃었다. 견습 기사는 뒤통수를 긁으며 다시 물었다.
혹시 저희한테 검술 좀 봐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다들 궁금해합니다.
그건 좀 곤란한데.
왜 곤란하십니까.
내가 뭘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데 남한테 가르쳐줄 수는 없잖아요.
선우결이 진심으로 답했다. 견습 기사는 그 말을 겸손으로 받아들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겸손하십니다.
그런 거 아닌데.
선우결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최인덕이 시계를 확인하듯 손짓했다.
다음 일정이 있습니다. 현암 사제님께서 오늘 오후에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현암 사제요?
백작님과 오래된 친분이 있는 분입니다. 치유 마법에 능하시고, 이런 초자연적 현상에도 지식이 깊으십니다.
선우결의 귀가 순간 쫙 펴졌다.
마법 전문가라는 거네.
잘됐다. 궁금한 거 좀 물어봐야겠다.
서재의 빈 검집, 검자루의 미묘한 저림, 어제 시야에 스쳐 지나간 이상한 문구.
뭔가 하나로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오후에 현암 사제가 오면 뭐부터 물어봐야 하나.
선우결은 정원을 걸으며 머릿속으로 질문 목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검은 뭔지.
빛기둥은 뭔지.
상태창은 원래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건지, 나만 보이는 건지.
하나씩 짚어가다 보니 질문이 끝없이 늘어났다. 이걸 다 물어봐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너무 캐물으면 이상하게 볼 수도 있는데.
일단 자연스럽게 흘려서 물어보자.
선우결이 계획을 세우는 동안 견습 기사는 다시 훈련으로 돌아갔다. 나무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다시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때 하늘 저편에서 다시 흐릿한 빛이 스쳤다.
간밤의 빛기둥이 남긴 잔광이었다.
선우결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최인덕도 시선을 따라갔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저건 못 보나.
최인덕한테는 안 보이는 건가.
선우결이 슬쩍 물었다.
저기, 하늘에 뭐 이상한 거 없어요?
어디 말씀이십니까.
최인덕이 하늘을 훑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역시.
선우결은 더 묻지 않고 시선을 거뒀다.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 뭔가가 자기 눈에만 보인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게 다가왔다.
저거 진짜 이대로 안 끝날 것 같은데.
선우결은 잔광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하늘을 응시했다. 최인덕이 다음 일정을 알리듯 말을 걸었지만, 그 목소리가 잠깐은 멀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