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형체가 완전한 모습을 갖추기까지 채 3초도 걸리지 않았다.
후드를 뒤집어쓴 것 같은 검은 실루엣이, 마치 프린터에서 인쇄물이 쭉 뽑혀 나오듯 허공에서 실체화됐다.
키는 대충 3미터쯤.
우리 학교 체육관 천장이 딱 저 정도 높이였던 것 같은데, 그 높이가 지금은 전혀 위안이 안 됐다.
낫도 아니고 검도 아닌,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형태의 무기가 그 손에 걸려 있었다.
누가 저걸 디자인했는지 몰라도 미감이 진짜 남다르다.
공포영화 소품실에서 예산 무제한으로 뽑아낸 것 같은 그 실루엣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거 코스트코에서 파는 대형 원예용 낫하고 좀 비슷한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뇌는 자꾸 딴 데로 샜다. 긴장 풀지 말라고 뇌한테 잔소리라도 하고 싶었다.
ZKKRSHHHH...
놈이 낸 소리가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재현이 안 됐다.
원작에서도 적명자의 대사는 늘 이런 식의 의사언어로 표기됐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설정 때문이었다.
소설 볼 때는 그냥 '아, 그런 컨셉이구나' 하고 넘겼는데, 실제로 저 주파수를 고막으로 직격 당해보니 컨셉이 아니라 재난이었다.
드릴로 유리를 긁는 소리와 사이렌 소리를 합쳐서 3배속으로 재생한 것 같은, 뭐 그런 음향.
"뭐, 뭐야 저거!"
윤소아가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목소리에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저 녀석 평소엔 허세도 좀 부리고 그러는데 지금은 허세 부릴 정신이 아예 없어 보였다.
"몰라, 준비해!"
차설아가 지팡이를 세웠다.
손끝에서 마력이 지지직 소리를 내며 모이는 게 보였다. 저 짧은 순간에도 발동 준비를 하는 걸 보면 역시 프로는 프로다.
나는 알았다.
너무 잘 알았다.
저게 적명자다. 진짜 최종보스. 강철도 온전한 몸으로 상대 못 했던 그 존재.
머릿속에서 원작 페이지가 자동으로 넘어갔다.
이 장면, 나는 최소 세 번 이상 정독했다. 강철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뭘 놓쳤는지, 다음 페이지에서 뭐가 죽었는지까지 다 외웠다.
그런데 그게 지금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3초 만에 깨달았다.
지식은 있는데 몸이 그 지식을 따라가는 속도가 다르다. 이건 시험공부랑 실전 시험이 다른 것과 비슷한 원리인데, 이번 시험 낙제하면 그냥 죽는다는 게 결정적 차이였다.
[욥기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겠느냐]
낚을 수 없다. 낚이는 건 우리 쪽이다, 지금.
저 새끼는 미끼 따위 필요 없다. 그냥 존재 자체가 낚싯대고 우리가 물고기다.
놈의 첫 공격은 원작에서도 유명했다. '절망의 파동'이라는 광역 스킬.
주변 일정 범위 안의 모든 생명체에게 즉각적인 공포와 무기력을 심는 기술이었다.
원작에서 강철의 파티는 이 첫 공격에 절반이 무릎을 꿇었다.
그 장면을 읽을 때 나는 '아 저기서 왜 안 피해, 뭐하는 거야' 하고 댓글창에 욕이나 쓸 준비를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죄송하다. 실제로 겪어보니 피할 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대응법을 알고 있었다.
원작 후반부, 강철이 이 기술을 파훼하는 장면이 나왔다.
답은 간단했다. 공포를 느끼기 전에, 먼저 움직여라.
이론은 항상 간단하다. 다이어트도 '적게 먹고 많이 움직여라'로 요약되지만 그게 제일 어려운 거 아닌가.
"다들 흩어져요! 지금 당장!"
소리치며 몸을 던졌다.
목이 찢어질 듯 소리쳤는데도 내 목소리가 저 ZKKRSHHHH 소리에 반쯤 먹혀서 제대로 전달됐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윙-
놈이 검을 휘두르는 궤적에서 시커먼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게 원작에서 말한 '절망의 파동'이었다.
색깔로 표현하면 그냥 검은색이 아니라, 채도랑 명도를 다 죽여버린 무채색.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훅 가라앉는 그런 색.
다들 반사적으로 흩어졌다. 내 지시가 아니라 본능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위기 상황에서 이론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하지만 나는 그 파동의 정확한 범위를 알고 있었기에 정확한 방향으로 몸을 던질 수 있었다.
원작 페이지에 그려진 범위 표시 이펙트가 눈앞에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진짜 게임 UI라도 있었으면 훨씬 편했을 텐데.
대부분은 피했다.
대부분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무서운 단어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대부분 만족" 같은 리뷰 문구를 볼 때마다 나머지 소수는 뭘 겪었길래 저런 리뷰를 남겼을까 궁금했는데, 이제는 그 나머지 쪽 심정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푹.
짧고 축축한 소리가 났다.
윤소아가 파동의 끝자락에 살짝 스쳤고, 무릎을 꿇으며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참았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무릎 좀 후들거릴 뿐이야!"
다행히 직격은 아니었다.
저 녀석 특유의 오기가 이 순간에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하지만 다인은 정면으로 맞았다.
"으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눈에서 초점이 흐려졌다.
"다인!"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것 같았다.
원작에서 이 파동에 직격당한 캐릭터는 최소 5분간 전투 불능 상태가 됐다.
5분. 그 5분이 전멸을 결정짓는 시간이었다.
5분이면 배달 앱으로 커피 한 잔 시켜도 도착 안 하는 시간인데, 전장에서는 그 5분이 인생 전체를 결정한다.
이 낙차가 진짜 어이없을 정도로 크다.
적명자가 다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원작 지식이 맞았다. 절망에 잠긴 대상을 우선적으로 노린다.
가장 약해진 먹잇감을 먼저 물어뜯는다는 점에서, 저 자식은 최종보스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극도로 효율적이었다. 효율 하나는 인정해줘야겠다. 인정하는 순간에도 소름이 끼치지만.
"안 돼!"
소리치며 몸을 던졌다.
원작 지식과 실전 사이의 거리, 그게 얼마나 먼지 이 순간 몸으로 배웠다.
아는 것과 그 자리에서 몸을 던질 수 있느냐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나는 지금까지 그 차이를 그냥 종잇장 한 장 두께쯤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한강 정도의 거리였다.
번쩍!
놈의 무기가 번쩍이며 다인을 향해 떨어졌다.
나는 몸으로 그걸 막았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물으면 답은 없다.
그냥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머리로 계산할 틈도 없었다. 계산기를 두드릴 시간에 이미 결과가 나와 있었다.
서걱.
소리가 났다. 소름 끼치게 조용한 소리였다.
그렇게 큰 무기가 사람 몸을 지나가는데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나. 차라리 요란한 소리였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
처음엔 뭐가 잘려 나갔는지도 몰랐다.
시야 오른쪽이 갑자기 새까매졌다.
마치 모니터 한쪽 화면이 갑자기 블랙아웃된 느낌. 아, 이거 고장 났나, 하고 착각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새까매진 공간에서, 뜨거운 통증이 폭발적으로 밀려왔다.
"으아아악!"
비명은 내 목에서 나왔다.
오른쪽 눈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놈의 무기가 내 우안을 그대로 베어갔다.
뜨거운 게 얼굴 반쪽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느낌이 났다. 손으로 만지지 않아도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전도서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지금이 딱 그 '때'였다. 내 눈이 사라지는 때.
엄청 재수 없는 때다.
성경 구절 인용할 정신이 남아있다는 것도 참 웃긴데, 이게 내 나름의 생존 방식이었다. 뇌가 너무 아프면 딴 데로 도망친다.
"이도훈!!"
차설아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높았다.
저 목소리에서 이렇게 큰 균열이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이, 이도훈아!"
다인이 정신을 차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방금까지 무기력에 잠식돼있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다급함으로 바뀌었다.
원작에서 이도훈이라는 이름은 언급조차 안 되는 모브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파티원 전체가 내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고 있었다.
이거 뭔가 뭉클한 장면인데, 통증 때문에 뭉클함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감동은 나중에 몰아서 하기로 하고 지금은 그냥 살아야 했다.
웃긴 얘기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원작 지식을 뒤지고 있었다.
적명자가 첫 공격을 성공시키면, 놈은 그 여세로 두 번째 공격을 곧바로 이어친다.
두 번째 공격까지 맞으면, 진짜 죽는다.
이건 그냥 문장으로 읽을 때는 별 감정 없이 넘긴 정보였는데, 지금은 그 한 줄이 사형 선고문처럼 무겁게 다가왔다.
남은 왼쪽 눈으로 놈의 다음 움직임을 필사적으로 쫓았다.
통증 때문에 초점이 흐려졌지만, 원작 지식이 시야를 대신했다.
놈이 무기를 다시 들어 올리는 그 짧은 순간이 보였다.
어깨 근육이 움직이는 방향, 무기가 그리는 예비 동작의 궤적. 이 짧은 순간을 캐치하지 못하면 정말 두 번째 죽음이 시작된다.
"다들, 물러나요!"
피가 흐르는 눈을 손으로 누르며 소리쳤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숨이 제대로 안 쉬어졌다. 그래도 목소리는 끌어냈다. 이게 안 나오면 다인이 정말 두 번째로 당한다.
무감정하게 위험을 은폐하던 나는, 이제 무감정할 여유가 없었다.
첫 참극이 벌어졌고, 파티는 이미 충격에 빠져 있었다.
윤소아는 아직 다리가 후들거리는 채로 검을 다시 쥐었고, 차설아는 지팡이 끝을 나를 향해 겨눈 채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다인은 아직 초점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들이 전부 나한테 꽂혔다.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 시선의 무게만큼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이건 아직 끝이 아니었다.
원작대로라면,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놈의 무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는 그 순간, 나는 남은 눈으로 똑똑히 봤다.
다음 궤적이 향할 곳은 다인이 아니었다.
바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