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저승사자님, 안 죽어요

1화

던전 입구에서부터 삽질 냄새가 났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습기 먹은 흙과 오래된 뼛가루 냄새가 코를 찔렀다는 소리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그래, 성경 말씀대로 해를 두려워하진 않았다. 근데 그건 내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아직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서였다. "이도훈, 뒤처지지 마." 앞서 걷던 차설아가 고개도 안 돌리고 말했다. 외형만 보면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어 보이는 체구인데, 목소리에는 나잇값 안 되는 위압이 있었다. 원작에서도 그랬다. 최고의 마법사, '노자로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온갖 밈의 소재가 되었던 사람. 실제로 만나 보니 그 별명이 참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 앞에서는 절대 말 못 할 별명이다. "넵." 짧게 대답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윗도리 안쪽, 심장 바로 옆에 넣어둔 지도를 손으로 한 번 더 확인했다. 종이 지도가 아니라,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지도였다. 입구를 지나자 통로는 급격히 좁아졌다.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 비슷한 것들이 희미하게 빛을 냈는데, 저게 '유적광석'이라는 이름의 발광 광물이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원작 3권 각주에 나온 설명이었다. 각주까지 외운 독자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근데 지금 그 각주 덕분에 내가 이 길이 막다른 길인지 아닌지를 미리 알고 있다는 게, 인생 참 아이러니했다. "저기 왼쪽 통로는 막혀 있어요. 오른쪽으로 가시죠." "어떻게 알아?" 차설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감이 좋아서요." "감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예언자 수준인데." 윗도리 속에서 심장이 철렁했다. 아니, 진짜로 예언자 코스프레 할 생각은 없었단 말이다. 이곳은 '잔영 유적'이다. 다크판타지 웹소설 「적요의 밤」에서 스물두 번째로 등장하는 던전이자, 원작 주인공 강철의 파티가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는 장소. 그리고 동시에, 지금 내가 속한 이 파티 — 차설아, 윤소아, 다인, 그리고 나 이도훈으로 구성된 이 조촐한 4인조가 전멸하는 장소였다. 그럴 리가. 처음 이 던전 입구에 발을 디뎠을 때, 내 안에서 그런 반문이 튀어나왔다. 설마 여기가, 진짜로 여기가? 뭐지, 이 익숙한 지형은? 답은 뻔했다. 나는 이 세계에 오기 전, 「적요의 밤」을 정주행으로 세 번, 발췌독으로는 셀 수도 없이 읽었던 독자였으니까. 전생하면서 이름 없는 모브 검사 '이도훈'의 몸에 떨어졌을 때, 나는 이게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믿었다. 모브는 죽어도 스토리에 지장이 없으니까. 배경처럼 살다가 배경처럼 사라지면 그만이라고. 그런데 웃긴 게 뭐냐면, 모브인 내가 어느 순간부터 진짜 파티원이 되어 있었다는 거다. 차설아가 나를 눈여겨봐서 사사로 거둬줬고, 윤소아랑은 동갑 친구처럼 지냈고, 다인은 뭔가 착오가 있었는지 나한테 이상하게 충성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원작에 있던 '전멸 파티'의 정확한 구성원이 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배달앱 리뷰 이벤트도 아니고, "당첨을 축하합니다, 당신은 전멸 엔딩에 응모되셨습니다" 이런 게 어디 있나. 근데 진짜로 있었다. 지금 여기, 내 발밑에. 촤르르르륵. 낡은 사슬 갑옷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다인이었다. "긴장혀? 얼굴이 하얘졌자너." 다인이 특유의 억양으로 물었다. 이국 부족 출신이라 발음이 살짝 뭉개졌다. "아니, 그냥 좀 더워서." 거짓말이었다. 지하 유적은 더울 일이 없었다. "더워? 여그 완전 냉장고자너." 다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박했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나는 대충 헛기침으로 넘겼다. "기침도 하네. 몸살 났능갸?" "아니라니까." 윗도리 속에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곳은 강철의 파티가 전멸을 각오했던 곳이고, 최종적으로는 내가 있는 이 파티도 원작에서 전멸하는 곳이다. 원작에서 우리 파티는 이 던전 심층부에서 '적명자(摘命者)'라는 이름의 존재와 마주친다. 적명자. 웹소설 독자들 사이에서 '진짜 최종보스'로 불리던 놈. 강철도 온전한 상태로는 절대 이기지 못했던, 죽음 그 자체를 형상화한 것 같은 몬스터. 원작에서 놈은 생존자의 절망을 양분으로 삼는다는 설정이었다. 먹이가 비명을 지를수록 더 강해지는, 말 그대로 '재미로 사람 죽이는' 타입. 원작 팬덤에서는 이 몬스터를 두고 별의별 밈이 다 돌았다. '적명자는 사실 츤데레다', '적명자 굿즈 나오면 삽니다' 같은 실없는 소리들. 근데 지금 내 눈앞, 아니 정확히는 내 귀와 등줄기로 그 존재감을 느끼고 있으니, 그런 밈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감상이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직접 마주칠 게 아니면 뭐든 웃을 수 있다는 거, 그거 진리였다. [전도서 1:2,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원작 작가가 이 구절을 이 던전 초반부 제목으로 뽑아 쓴 걸 기억한다. 그때는 그냥 있어 보이려고 쓴 인용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진짜 헛될 예정이라는 스포일러였다. 작가야, 그럴 거면 좀 더 친절하게 스포일러 배너라도 달아주지. "이도훈, 왜 그렇게 조용해?" 윤소아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열다섯 살 치고는 너무 담담한 눈빛을 하고 있는 애였다. 검을 다루는 재능은 파티 내 최고였지만, 표정은 늘 나이보다 몇 배는 나이든 사람 같았다. "별거 아니야. 그냥 지형이 익숙해서." "익숙해? 여기 처음 오는 거잖아." 맞다, 처음 오는 거다. 적어도 이 몸으로는, 이 파티로는 처음이다. 하지만 나는 이 던전의 모든 갈래길, 모든 함정, 모든 몬스터의 스폰 위치까지 다 알고 있었다. 독서량이 스펙이 되는 순간이 있을 줄 몰랐지. "기시감이지 뭐." 적당히 넘기고 다시 걸었다. 윤소아는 그런 나를 잠깐 빤히 쳐다보다가, 별말 없이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저 나이에 저렇게 눈치 없는 척을 잘하는 것도 재능이다. 아니, 사실은 눈치가 너무 좋아서 일부러 모른 척해주는 걸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지금은 고마웠다.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벽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자로 새겨진 벽화가 죽 이어졌는데, 원작에서는 이게 '잔영 유적'이라는 이름의 유래라고 설명했다. 과거 이곳에서 죽은 존재들의 잔영이 벽에 각인되었다는 설정.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실상은 그냥 무덤이라는 뜻이었다. 낭만은 죽고 나서 붙는 수식어일 뿐이다. "여기 벽화, 뭔가 슬퍼 보이네." 차설아가 잠깐 멈춰서 벽을 만졌다. "만지지 마세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왜?" "…그냥, 뭔가 불길해서요." 사실은 안다. 원작에서 이 벽화를 만진 캐릭터 하나가 저주에 걸렸다. 경미한 저주였지만, 지금 우리한테는 경미한 것도 사치였다. 차설아는 손을 슬쩍 뗐다.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민해." "…원래 예민한 편이에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예민한 이유가 그녀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뿐이었다. 그때였다. 쿠구구구... 땅이 낮게 울렸다. 진짜 지진이라기보다는, 뭔가 거대한 것이 아주 멀리서 숨을 쉬는 소리 같았다. "뭐야, 저 소리?" 차설아가 처음으로 걸음을 멈췄다. 목소리에서 여유가 조금 빠졌다.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적명자가 깨어난 소리였다. 원작에서는 정확히 이 지점, 던전 8층 통로에서 강철의 파티가 처음으로 이 존재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세 시간 후, 강철의 파티원 중 세 명이 죽었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아니, 서늘한 걸 넘어서 그냥 얼음을 등에 갖다 붙인 기분이었다. 머리로는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세 시간. 정확히 세 시간이면 원작 기준으로 첫 희생자가 나온다. 지금부터 우리가 뭘 어떻게 하든, 그 시계는 이미 돌기 시작한 거였다. 배달앱 예상 도착시간처럼 정확하게, 죽음도 예상 시간이 뜨는 거였다. 근데 이건 취소 버튼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별거 아닐 거예요." 입에서는 이상하게 태연한 말이 나갔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별거 아니면 왜 얼굴이 그래?" 다인이 예리하게 물었다. 윤소아도 슬쩍 내 얼굴을 살폈다. 대답 없는 시선이 더 무서웠다. 차설아는 이미 지팡이를 고쳐 쥐고 있었다. 노련한 마법사답게, 저 진동이 뭘 뜻하는지 어렴풋이 눈치챈 눈빛이었다. "이도훈." 차설아가 나를 똑바로 봤다. "너, 뭐 알고 있는 거 있으면 지금 말해." "…" "지금." 머릿속에서 오만 가지 선택지가 스쳐 지나갔다. 전부 말한다? 그럼 나는 미래를 아는 정신병자거나, 뭔가 수상한 놈으로 낙인찍힌다. 아무 말도 안 한다? 세 시간 뒤 세 명이 죽는다. 그 중간이라는 게 있을까.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지금부터 벌어질 일이, 원작 그대로 흘러간다면 우리 넷 다 여기서 죽는 거였으니까. 농담이다. 근데 진짜다. 둘 다 사실이라는 게 제일 웃긴 부분이다. 쿠구구구... 소리는 다시 한번, 조금 더 가깝게 울렸다. 마치 저 밑에서 뭔가가,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이제 막 알아챘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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