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별거 아니라니까요."
두 번째로 같은 말을 했다.
첫 번째보다 조금 더 힘이 빠진 걸 눈치챈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차설아는 미간을 좁힌 채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이 꽤 오래 갔다.
"너 요즘 이상해. 던전 들어오기 전부터 뭔가 계속 신경 쓰던데."
"기분 탓이에요."
"기분 탓이라 하기엔 표정이 너무 굳어 있어."
찔렸다. 찔린 걸 티 내지 않는 게 관건이었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차설아의 눈빛이 조금도 풀리지 않았으니까.
이 여자는 파티 내에서 최강 전력이자, 동시에 제일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 두 가지가 같은 사람 안에 있으면 이렇게 피곤하다.
차라리 힘만 세고 눈치는 없었으면 얼마나 편했을까.
아니, 그럼 벌써 죽었겠지. 원작에서도 그렇게 죽었으니까.
[욥기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갑자기 이 구절이 생각난 이유는 하나였다.
지금 이 던전의 구조, 함정, 보스 패턴까지 다 알고 있는 나야말로 이 세계의 '기초'를 이미 다 읽고 온 사람이었으니까.
신은 아니지만, 스포일러를 미리 받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런 위치에 서 있다는 게 얼마나 웃긴 일인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드라마 몰아보기 하듯 이 세계의 결말을 다 알고 앉아 있으면서, 정작 지금 눈앞의 인물들에게는 그 결말을 말해줄 수 없다.
스포일러 유포죄. 만약 그런 법이 있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위반 중이다.
일행에게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게 문제였다.
알리면 이렇게 될 게 뻔했다.
"너 뭔데 미래를 알아?" "너 혹시 이 세계 관찰자야?" "미친놈 아냐?"
최악의 경우, 나를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하며 파티에서 쫓아낼 수도 있었다.
원작에서도 정보를 독점한 조력자가 배척당하는 클리셰는 흔했으니까.
그런 클리셰의 주인공이 나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안 알리면 이렇게 될 게 뻔했다.
동료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원작 그대로, 여기서 다 죽는다.
선택지가 두 개인데 둘 다 지뢰였다.
인생 참, 밸런스 패치가 필요하다.
기획자 나와라. 도대체 이런 선택지를 누가 만든 거야.
결국 나는 세 번째 길을 택했다.
알리지 않되, 최대한 상황을 유리하게 이끄는 것.
동료들에게는 무감정한 얼굴로, 속으로는 미친 듯이 원작 지식을 뒤지는 것.
사실 이건 길이라기보다는, 앞의 두 지뢰밭 사이에 있는 아주 좁고 위태로운 외줄이었다.
떨어지면 양쪽 다 지뢰다.
"다인, 여기서부터는 왼쪽 통로로 갈게요."
지도도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왼쪽? 오른쪽이 더 넓어 보이는디."
"오른쪽은 함정이 있어요."
"함정을 어떻게 알어?"
젠장, 실수했다.
"...감이에요."
말도 안 되는 답이었지만, 다인은 이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감 용혀. 저번에도 맞았자너."
그래, 저번에도 그랬다. 저번에도, 그전에도, 계속 원작 지식으로 맞춰왔으니까.
이쯤 되면 파티원들이 왜 아직 의심을 안 하는지가 더 이상하다.
답은 간단했다.
나는 그동안 조용히, 아무렇지도 않게 위험을 피해 왔다.
너무 자연스럽게 피해서, 다들 그냥 '이도훈은 감이 좋다'는 결론을 내려버린 거다.
한번은 윤소아가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오빠, 혹시 전생에 무당이었어요? 아니면 도사?"
그때 나는 웃으며 아니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전생에 이 소설 완독자였어'라고 답하고 싶었다.
말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지.
[잠언 27:12,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딱 맞는 구절이었다.
근데 이번엔 못 숨는다.
왜냐면 이번엔 파티 전원이 재앙 한복판을 걷고 있으니까.
숨을 곳도, 도망칠 곳도 없다.
이건 마치 임대차 계약 만료 통보를 받은 세입자의 심정과 비슷했다. 나가라고 해도 나갈 곳이 없는, 딱 그 기분.
왼쪽 통로로 들어서자 공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차갑고, 무겁고, 뭔가가 지켜보는 느낌.
등 뒤로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는데, 이 던전에 바람이 불 리가 없었다.
그러니 저건 바람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였다.
원작에서 이 구간은 '적명자의 영역'이라 불렸다.
반경 500미터 안에서는 그 존재의 기운이 상시 감지되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밀도가 높아진다.
소설로 읽을 때는 그냥 문장이었다.
'기운이 짓눌렀다' 라는 한 줄로 끝날 걸, 지금은 몸으로 그 문장을 통과하고 있다.
독서와 체험은 이렇게나 다르다.
"으, 소름 돋아."
윤소아가 팔을 문질렀다.
"뭔가 있어. 확실히."
"눈치 빠르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윤소아는 파티의 마법사였다. 감각이 예민한 만큼 겁도 많았는데, 지금 그 팔뚝의 소름이 딱 원작에서 묘사된 그대로였다.
'적명자의 영역에 들어선 이들은 이유 없는 오한을 느낀다.'
그 문장을 쓴 작가가 지금 이 순간을 봤다면 뿌듯했을 거다. 나는 뿌듯하지 않았다. 그냥 무서웠다.
원작 지식에 따르면, 이 시점에서 강철의 파티는 아직 '적명자'라는 이름조차 몰랐다.
그들은 그저 강력한 몬스터가 있다는 정도로만 인지하고 진입했다가, 세 시간 만에 세 명을 잃었다.
그중 한 명은 마지막까지 동료를 지키려다 재생이 봉인된 채 서서히 죽어갔다.
그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라면을 먹다가 국물을 흘렸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지금 그 장면 속으로 내가 걸어 들어가고 있다.
우리는 그것보다는 한 발 나아간 상태였다.
적어도 나 한 사람은 놈의 이름과 능력, 패턴, 약점까지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안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
독서와 실전은 다르다. 요리 유튜브 백 번 봤다고 미슐랭 셰프가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나는 지금 요리 유튜브 백 번 본 사람이 실제 주방에 서 있는 격이었다. 그것도 목숨이 걸린 주방에.
적명자의 능력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절망을 먹고 힘을 키운다.
둘째, 죽음의 기운으로 상대의 재생력을 봉인한다. 그래서 힐러가 있어도 치명상은 못 고친다.
셋째, 가장 강한 자를 먼저 노린다. 파티의 기둥을 부러뜨리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소리다.
세 가지를 조합하면 답은 하나다.
절망을 주지 말고, 재생이 봉인되기 전에 끝내고, 강한 사람을 숨겨야 한다.
말은 쉽다.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게 문제다.
마치 배달앱에서 별점 5점, 배달비 무료, 30분 이내 도착을 동시에 만족하는 가게를 찾는 것과 비슷했다. 그런 가게는 없거나, 있어도 금방 망한다.
그 말은, 파티 내 최강 전력인 차설아를 최우선 타겟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차설아가 죽는 건 원작 전개상 확정된 사건이었으니까.
그 장면을 읽었을 때 나는 책을 덮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 정도로 잘 쓰인, 그리고 잔인한 장면이었다.
지금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이 사람이 그 장면의 주인공이 될 거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마태복음 26:39,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그냥, 이 잔이 나한테 왔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차설아 대신, 내가 그 잔을 받아도 되니까.
물론 신께 이런 부탁을 드릴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냥 스포일러 좀 아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니까.
"이도훈, 앞장서."
차설아가 짧게 명령했다.
"제가요?"
"네 감이 제일 정확하잖아. 앞장서."
앞장서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말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적명자가 파티에서 강한 자를 노린다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놈은 힘의 강도를 감지하지, 위치를 감지하지 않으니까.
"네."
대답하고 앞으로 걸었다.
걸음이 떨렸지만, 표정은 계속 무감정하게 유지했다.
속으로는 계속 되뇌었다. 나는 미끼다. 나는 미끼다. 미끼는 원래 표정이 없어야 한다.
원작에서 이 구간 다음에 뭐가 나오는지 알고 있다.
적명자와의 첫 조우.
그리고 놈은 언제나, 예상보다 빠르게 나타난다.
원작 독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말이 있었다.
'적명자는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 문장 밑에 달린 댓글까지 기억난다.
'그래서 3화 만에 주인공 파티 절반이 죽었죠. 작가님 진짜 미쳤음ㅋㅋ'
그때는 그냥 웃긴 댓글이었다.
지금은 웃을 수가 없다.
나는 준비가 안 됐다.
원작 지식이 있어도, 안다는 것과 대응할 수 있다는 것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아는 것과 하는 것 사이에 다리가 있다면, 그 다리는 지금 불타고 있었다.
다인이 뒤에서 낮게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조용하네. 몬스터 소리도 안 나고."
"조용한 게 더 무서운 거예요."
"그건 또 뭔 소리여."
"폭풍 전야라고 하죠."
말을 뱉고 나니 스스로도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원작에서도 이 구간은 딱 이만큼의 정적이 흐른 뒤에 놈이 나타났다.
쿠구구구...
다시 그 소리가 났다. 아까보다 훨씬 가까웠다.
땅이 미세하게 떨렸다. 발밑으로 진동이 올라왔다.
윤소아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차설아는 이미 검자루에 손을 얹고 있었다.
"온다."
내가 먼저 중얼거렸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쪽 어둠 속에서 검은 형체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마치 잉크를 물에 떨어뜨린 것처럼, 어둠 그 자체가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그 형체는 천천히 사람의 윤곽을 만들어갔다.
팔이, 어깨가, 그리고 얼굴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텅 빈 구멍이.
원작에서 몇 번이나 읽었던 그 첫 등장 장면이, 지금 내 눈앞에서 그대로 재생되고 있었다.
활자가 아니라 실체로.
그리고 나는, 그 실체가 다음 순간 무엇을 할지 알고 있었다.
알아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