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인형사와 침묵한 죄인

5화

밤이 깊어지자 별궁 안의 경계가 조금 느슨해지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촛불 하나가 꺼지고 나면 그 다음 촛불이 켜지기까지 걸리는 시간, 순찰병이 회랑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사라지기까지 걸리는 시간, 그런 것들을 소림이 며칠 동안 몰래 세어가며 만든 시간표였다. 자정이 되기 직전, 딱 한 번의 짧은 틈이 생긴다고 했다. 그 틈에 서쪽 정원까지 가려면 별궁 뒷문을 통해 회랑을 두 번 꺾어야 했는데, 이게 성공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첩보물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시간표 하나에 목숨을 걸고 있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했지만, 지금 웃을 처지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머리보다 발이 먼저 움직이는 밤이었다. "영애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소림이 낮게 속삭이며 물었다. 목소리에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건을 눌러썼다. 두건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 한 올까지 다 신경이 쓰이는 밤이었다. "이게 마지막 기회일 거예요. 내일이면 저는 청하로 떠나야 하니까요." 그 말을 하는 순간 목이 살짝 메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그냥 단어일 뿐인데, 왜 그게 목구멍에 걸려서 넘어가지 않는 건지. 회랑을 지날 때마다 발소리 하나에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 발소리인지 남의 발소리인지도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다. 순찰병의 등불이 저 멀리 보일 때마다 나는 벽에 몸을 붙이고 숨을 죽였는데, 이런 게 첩보라는 건가 싶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등불 하나에 벽에 딱 붙어서 숨도 못 쉬는 꼴이라니. 공작 영애가 밤중에 몰래 정원을 기어다니는 신세가 되다니,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그때의 나였다면 이런 처지를 상상만 해도 기함했을 텐데, 지금은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사람이 이렇게 빨리 적응할 수 있는 존재였던가. 회랑을 두 번째로 꺾어 서쪽 정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나뭇가지 사이로 스치는 바람 소리에도 온몸이 얼어붙었다. 순찰병이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면 어떻게 하나, 소림이 계산한 시간이 틀렸으면 어떻게 하나. 온갖 최악의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럴수록 발걸음은 오히려 더 빨라졌다. 여기서 멈추면 정말 끝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서쪽 정원에 도착했을 때, 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두 아이의 실루엣이 보였다. 재현과 다은이었다. 나는 그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겨우 참아내며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언니." 다은이 먼저 달려와 내 품에 안겼고, 재현도 뒤따라와 조용히 내 손을 붙잡았다. 다은의 몸이 생각보다 작고 가벼워서, 그게 또 마음을 무너뜨렸다. "괜찮은 거야? 다친 데는 없어?" 나는 두 아이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두 손으로 얼굴을 이리저리 만져보듯 확인했다. 다행히 겉으로 보기에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재현의 눈 밑에 짙게 든 그늘이 마음에 걸렸다. 저 나이에 저런 그늘이 생길 일이 뭐가 있을까 싶다가, 곧 답은 뻔했다. 나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언니. 그냥... 계속 감시받는 게 답답할 뿐이에요." 재현이 애써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 웃음이 오히려 더 아프게 다가왔다.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눈에 훤히 보였다. "이제 청하로 가신다고... 그럼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다은이 울먹이며 물었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청하에서 조용히 지내는 동안 너희는 안전할 거야. 전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으니까." 물론 그 약속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는 나조차 확신이 없었지만, 지금 이 아이들에게 다른 말을 해줄 수는 없었다. 태자의 약속이라는 게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는 이미 몇 번이나 겪어봤으면서, 또 이 순간엔 그 약속을 믿는 척해야 했다. 이런 게 어른이라는 건가 싶어서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언니, 저는 언니가 옳은 일을 했다는 거 알아요." 재현이 갑자기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말에 놀라서 아이를 쳐다봤다. "태자 전하가 성녀님을 이용해서 뭔가 꾸미고 있다는 것도, 밀 창고 이야기도... 저 태자궁에서 시종으로 있으면서 조금씩 눈치챘어요." 재현의 눈빛이 그 순간 나이답지 않게 단단해 보였다. 저 조그만 몸으로 그 위험한 곳에서 눈치를 살피며 살았을 걸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위험한 얘기야. 그런 얘기는 함부로 입에 담지 마." 나는 다급히 아이를 말렸지만, 재현은 고개를 저으며 소매 안에서 작게 접힌 종이 뭉치를 꺼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게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이거, 언니가 갖고 있던 증거 사본이에요. 알현실 가시기 전에 몰래 하나 더 만들어뒀었잖아요. 그거 제가 보관하고 있었어요." 나는 그 종이를 받아들며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맞다, 만약을 위해 사본을 하나 더 만들어 재현에게 맡겨뒀었는데, 그 사실을 알현실의 혼란 속에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 난리를 겪는 동안 이 아이 혼자 이걸 품고 있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걸 왜 지금..."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재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언니가 청하로 가시면, 제가 이걸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을게요. 언젠가 다시 쓸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그 말에서 나는 이 아이가 이미 이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 어린 동생이 벌써 그런 각오를 하고 있다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열몇 살짜리가 이런 각오를 해야 하는 세상이라니, 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고마워, 재현아. 그리고 다은이도... 언니가 미안해. 너희를 이런 일에 끌어들여서." 나는 두 아이를 번갈아 안으며 그렇게 말했다. 다은이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언니 잘못이 아니에요. 태자 전하랑 그 성녀가 나쁜 거예요." 그 순진한 말이 오히려 더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아이들도 알고 있는 걸, 그 궁 안의 어른들은 다들 모르는 척하고 있는 셈이었다. 멀리서 순찰병의 발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다 됐다는 뜻이었다. 소림도 옷깃을 당기며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제 가봐야 해. 서로 조심하자. 언니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테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손을 꼭 붙잡았다가 놓았다. 손을 놓는 그 짧은 순간이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발걸음을 돌리는 그 순간이 그렇게 무겁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별궁으로 돌아온 나는 재현에게 받은 증거 사본을 옷 안쪽 깊숙이 숨겼다. 손끝으로 몇 번이나 눌러 확인하고서야 겨우 마음이 놓였다. 이건 청하로 가져갈 유일한 무기였다. 소림이 옆에서 짐을 정리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영애님, 청하 백작가에 대해 좀 알아봤는데... 들으실 준비가 되셨어요?" 그 말투에서 나는 이게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소림이 저런 조심스러운 말투를 쓸 때는 항상 안 좋은 소식이었다. "백작부인 한서인이라는 분이 계신데, 영지 세금을 과도하게 걷어서 사치를 부린다는 소문이 많아요. 그리고 그 집 외아들, 강도현이라는 분은..." 소림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궐 안에서는 소문난 방탕아라고들 해요. 도박이며 여자 문제로 이미 여러 번 구설수에 올랐다고." 방탕아.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한숨이 나왔다. 유배지에서 냉대받는 것도 모자라, 혼약을 강요받은 상대까지 그런 인물이라니. 이보다 더 완벽하게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을까 싶었다. 세금 착복하는 시어머니 감에 도박꾼 남편감이라니, 이건 무슨 삼류 소설에서나 나올 조합인가 싶었다. 그런데 왜인지, 소림이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뭔가 확신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확신이 있으면 확신 있게 말하고, 없으면 없다고 하면 될 텐데, 저 애매한 표정은 뭔가. "뭔가 더 있어요?" 나는 물었다. 소림이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했지만, 그 눈빛이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캐물을 여유가 없었다. 내일이면 나는 이 궁을, 이 아이들을 뒤로하고 청하로 떠나야 했으니까. 지금 캐물어봐야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고, 나 역시 지금은 다른 걱정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창밖으로 별이 하나둘 사라지고 동이 트기 시작했다. 밤새 한 번도 눕지 못한 몸이 뻐근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나는 짐 꾸러미 위에 놓인 증거 사본을 다시 한번 매만지며 다짐했다. 청하에서 어떤 냉대를 받든, 어떤 방탕아를 만나든, 나는 결코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이 종이 한 장이 언젠가는 그 궁을 뒤엎을 무기가 될 거라고. 그렇게 몇 번이나 되새기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하지만 그 다짐이 무색하게, 청하 백작가의 대문 안에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존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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