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인형사와 침묵한 죄인

2화

정자로 돌아와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이미 마음은 콩밭에, 아니 콩밭도 아니고 아예 다른 나라에 가 있었다. 소림의 말이 자꾸 귓가에서 맴돌았고, 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두 달 전 그날을 떠올렸다. 찻잔 표면에 어린 내 얼굴이 웬일로 심각해 보여서, 나는 잠깐 그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다니,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그 모든 게 시작된 건 순찰이었다. 선우 공작가의 영애로서 나는 정기적으로 변경 지역을 순찰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왕가의 명목상 감찰이었는데, 사실은 형식적인 절차에 가까웠고 대부분의 귀족들은 이 임무를 대충 처리하고 돌아가곤 했다. 마차 안에서 낮잠 한숨 자고 돌아와서는 "백성들이 다들 평안하더이다" 한 줄로 보고를 끝내는 게 관례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눈으로 보고 오는 게 진짜 감찰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래서 그날도 마을을 하나하나 돌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직접 보지 않은 것을 안다고 말하지 마라." 그 말이 이렇게까지 내 발목을 잡을 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러다 한 마을 어귀에서 그 아이를 봤다. 배가 볼록하게 부어오른 채로 길가에 쓰러져 있던 아이. 얼핏 보면 배부르게 먹어서 그런 것처럼 보이는, 그 잔인한 착시.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그 마을 이장의 말로는 지난가을부터 배급이 끊겼다고 했다. "영애님, 왕실 창고에서 곡식이 나온다는 공문은 받았는데 실제론 아무것도 온 적이 없습니다." 이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공문은 오는데 곡식은 안 온다니, 이게 무슨 유령 배급이란 말인가. 돌아오는 길에 나는 왕실 창고의 출납 장부를 몰래 확인해봤다. 처음엔 그냥 확인차 들여다본 거였는데, 볼수록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장부상으로는 매달 막대한 양의 밀이 각 지방으로 배급되고 있었지만, 실제 창고 재고는 그에 한참 못 미쳤다. 숫자는 그럴듯했다. 너무 그럴듯해서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원래 도둑질이라는 게 서투르면 금방 들키고 정교하면 아예 안 들키는 법인데, 이건 딱 중간, 들킬 듯 말 듯한 어중간한 정교함이었다. 이건 단순한 행정 착오가 아니었다. 누군가 조직적으로 곡식을 빼돌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데 두 달이 걸렸다. 창고 관리 책임자가 왕태자궁 소속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 이야기는 훨씬 복잡해졌는데, 이헌이 직접 관여했다는 물증을 찾기까진 정말 죽을 고생을 했다. 밤마다 몰래 서고를 뒤지고, 낮에는 태연하게 다과회에 나가 웃고 떠들면서, 속으로는 오늘 밤 또 어디를 뒤져야 하나 계산했다. 이중생활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낮에는 얌전한 공작 영애, 밤에는 정체불명의 서류 도둑. 소림과 몇몇 믿을 만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결국 나는 창고 관리 책임자와 이헌 사이에 오간 서신 사본과 실제 재고 대조 기록을 손에 넣었고, 이게 바로 오늘 내가 알현실로 들고 갈 증거였다. 소매 속에서 그 서류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부스럭거리는 느낌이었다. 아니, 살아 있는 게 아니라 내 목숨을 쥐고 있는 거겠지. "영애님, 정말 이걸 오늘 발표하실 거예요?" 소림이 다과회 자리로 돌아온 나에게 다시 한번 조심스레 물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눈빛은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이렇게까지 왔는데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뿐이었다. 웃음이 나오는데도 정작 손끝은 차가웠다. 이게 바로 겉과 속이 다르다는 거구나, 어쩐지 실감이 났다. 아이의 부은 배, 이장의 떨리던 목소리, 그런 것들을 외면하고 다시 편안한 다과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찻잔에 담긴 이 향긋한 차 한 모금과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삼켰을 흙탕물 한 모금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성녀님에 대해서 좀 더 알아봤어요." 소림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주변을 슬쩍 살피는 그 조심스러운 몸짓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한소은이라는 분, 평민 출신인데 반년 전에 갑자기 신전에서 치유 능력을 각성했다고 해요. 그런데 이상한 게, 그 각성이 있기 직전에 태자 전하와 은밀히 접촉했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 말에 나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각성 전에 접촉이라니, 그게 우연일 리가 없었다. 신전의 성녀라는 게 하늘이 내려준 존재라고들 하는데, 하늘이 내려주기 직전에 태자가 먼저 만났다니, 이건 하늘보다 태자가 더 발이 빠른 셈이었다. "그럼 성녀의 능력이라는 게..." 나는 말을 흐렸고, 소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태자 전하가 성녀님을 이용하고 있는 건 확실해요. 요즘 궐 안 여론이 성녀님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있거든요. 백성들 사이에서도 성녀님을 자비의 상징처럼 떠받들고 있고요." 나는 이 말을 들으며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이헌이 여론을 이렇게까지 준비해뒀다면, 내가 오늘 증거를 내놓는다 해도 사람들이 그걸 순수하게 받아들일지 의문이었다. 자비의 상징 옆에서 곡식 도둑을 고발하는 여자라니, 그림이 벌써 나쁘게 그려지는 게 눈앞에 보였다. 사람들은 진실보다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헌은 이미 훨씬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놓았다. "게다가..." 소림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그 망설임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나쁜 소식은 항상 이렇게 뜸을 들이고 나온다. "태자 전하께서 최근에 재현 도련님과 다은 아가씨를 태자궁 근처로 자주 부르셨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손에 든 찻잔이 살짝 흔들려서, 나는 티가 나지 않게 얼른 내려놓았다. 재현과 다은, 내 남동생과 여동생이다. 왕궁에서 재현은 태자의 시종으로, 다은은 왕립 학원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태자가 굳이 그 아이들을 부를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시종이니 업무상 부를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봤지만, 다은은 시종도 아니고 그저 학원생일 뿐이었다. 학원생을 태자궁 근처로 자주 부른다? 이건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너무 노골적이었다. "설마."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그것뿐이었다. 소림도 더는 아는 게 없다고 했지만, 나는 이미 최악의 상상을 하고 있었다. 이헌이 만약 재현과 다은을 이용해 나를 압박할 생각이라면, 이건 단순한 정치 싸움이 아니라 인질극이었다. 그것도 아주 우아하게 포장된 인질극. 칼을 들이대지 않아도 사람을 옭아맬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걸, 나는 지금 이 순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다과회가 끝나갈 무렵 궁녀 하나가 다가와 알현 시간이 앞당겨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이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이헌이 뭔가를 더 준비했다는 걸 확신했다. 시간을 앞당긴다는 건 내가 준비할 시간을 줄이겠다는 뜻이었고, 그건 곧 그가 이미 나보다 한 발 앞서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체스라면 이건 상대가 벌써 세 수를 앞서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몇 수를 뒤에 있는지조차 가늠이 안 됐다. "영애님, 정말 가시겠어요?" 소림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걱정과 함께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나는 서류 뭉치를 소매 깊숙이 밀어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이미 두 달을 걸어온 길이었고, 그 굶주린 아이의 얼굴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재현과 다은이 왜 태자궁에 불려갔는지, 그 답을 아직 모른다는 사실이 자꾸 발목을 붙잡는 느낌이었다. 마치 신발끈이 어딘가에 걸린 채로 뛰어야 하는 기분이었다. 알현실로 향하는 복도는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쳤고, 소매 속 서류의 무게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복도 양옆에 늘어선 시종들의 시선조차 오늘은 유난히 따갑게 느껴졌는데, 이게 다 내 착각인지 아니면 정말로 다들 뭔가 알고 있어서 저러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앞당겨진 이 시간, 그리고 성녀와 함께 등장할 거라는 이헌. 대체 그가 무슨 패를 준비해두었는지, 나는 알현실 문이 열리기 전까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저 문 너머에서 벌어질 일이, 오늘 하루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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