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알현실 문이 열리기 직전, 나는 소매 속 서류의 무게를 손끝으로 다시 한번 확인했다. 두 달을 준비한 증거였다. 이장의 증언, 굶주린 아이의 얼굴, 몰래 빼낸 장부 사본까지, 이 안에 다 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이헌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고, 나는 그렇게 자신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얼마나 오만한 계산이었는지.
문이 열렸다.
들어서는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즉시 느꼈다. 평소라면 대신들 몇몇과 국왕만 자리해 있어야 할 공간에 낯선 얼굴들이 유난히 많았고, 벽을 따라 늘어선 근위병의 수도 평소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뭐지, 이 분위기는. 무슨 국가 행사도 아닌데 왜 사람이 이렇게 많은가. 그 중심에 서 있는 건 예상대로 왕태자 이헌이었다.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얼굴, 언제나처럼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 그리고 그 옆, 하얀 신관복을 입은 여인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서 있었다. 저 사람이 성녀 한소은인가. 소문으로만 듣던 얼굴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예를 갖춰 국왕 앞에 무릎을 꿇었고, 속으로는 소매 안 서류를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증거를 내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은 이헌이 먼저 입을 여는 순간 완전히 무너졌다.
"아버지,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밝혀야 할 죄인이 있습니다."
이헌의 목소리가 알현실 전체에 낮고 무겁게 깔렸다. 나는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눈을 깜박였다. 죄인이라니,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굴 가리키는 말인가. 설마, 아니겠지. 설마.
"선우은유 영애가 성녀님을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나아가 국가 전복을 도모했다는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뭐라고?
머릿속이 순간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국가 전복이라니, 성녀를 괴롭혔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나는 이헌 쪽을 쳐다봤지만 그의 표정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고, 오히려 승리를 확신한 듯한 여유마저 엿보였다. 저 낯짝, 저게 죄인을 고발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이미 이긴 게임을 즐기는 사람의 얼굴이라는 걸 나는 즉시 알아챘다. 이 자식이 선제공격을 준비해왔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순간,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달 동안 내가 증거를 모으고 있다는 걸, 저놈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알고서도 놔둔 거다. 내가 증거를 다 모으고 알현실에 들어오는 그 순간, 딱 그 순간에 뒤집으려고.
"태자 전하, 이게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겉으로는 예의를 차렸지만 속으로는 이 미친놈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도대체 무슨 증거를 조작했다는 거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얼굴은 최대한 담담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게, 이게 진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일이구나 싶었다.
성녀 한소은이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눈물이 살짝 고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영애님, 저는 그저 백성들을 치유하는 데만 집중하고 싶었는데... 영애님께서 자꾸 저를 감시하고 협박하셨어요."
낮고 떨리는 목소리였는데, 나는 그 순간 이게 완벽하게 짜인 연극이라는 걸 눈치챘다. 저 눈물, 저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 저 완벽한 타이밍의 침묵까지, 하나하나가 다 계산된 동작처럼 보였다. 협박이라니, 나는 이 여자를 오늘 처음 봤는데. 성녀라는 사람이 저렇게 연기를 잘해도 되는 건가, 신전에서 가르치는 게 치유술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감상할 때가 아니었다.
"협박이라니, 저는 성녀님을 뵌 적이 오늘이 처음입니다."
나는 반박했지만, 이미 알현실 안 대신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고 있는 걸 느꼈다. 몇몇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젓고, 몇몇은 벌써 나를 죄인으로 확정 지은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여론전이라는 거구나. 증거고 사실이고 상관없이, 저 눈물 한 방울이 이 자리의 공기를 다 뒤집어버렸다.
이헌이 서류 하나를 꺼내 국왕에게 올렸다.
"여기 서신 사본이 있습니다. 은유 영애가 성녀님을 위협하며 신전 활동을 방해하라 지시한 내용입니다."
저건 필체를 흉내 낸 위조 서신일 게 뻔했다. 나는 내 손글씨가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안다. 저 서신에 찍힌 글자들, 획이 조금 과장되고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게 딱 남이 흉내 낸 필체였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필체 감정을 해달라고 요청할 여유가 나에게 있을까. 이 자식이 내가 증거를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아예 나보다 먼저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버린 거였다. 두 달간 발품 팔아 모은 증거가, 이 몇 장짜리 위조 서류 앞에서 무력해지고 있었다.
하늘이 노래지는 느낌, 이런 게 진짜 절망이라는 감정인가 싶었다. 나는 소매 속 서류를 꺼내려 손을 움직였다. 이렇게 당할 수는 없다. 지금 꺼내야 한다. 지금 아니면 늦는다.
그 순간 알현실 문 쪽에서 익숙한 두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재현과 다은.
병사 두 명 사이에 조용히 서 있는 그 아이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다은은 눈물을 참는 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재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지만, 옆에 선 병사가 어깨를 짓누르듯 손을 얹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인질.
그 단어가 머릿속을 강타하는 순간 나는 손을 멈췄다. 저 아이들이 왜 여기 있는지, 소림이 말했던 그 태자궁 방문이 뭘 위한 것이었는지 이제야 완전히 이해가 됐다. 그때 소림이 이상하게 서둘러서 태자궁에 다녀오라고 했었지. 그게 이런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준비였던 건가. 이헌은 처음부터 내가 증거를 들고 올 걸 알고 있었고, 재현과 다은을 인질로 잡아 내 입을 막을 준비를 해둔 거였다. 만약 내가 지금 증거를 꺼내들고 반박한다면, 저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병사들의 눈빛이 그냥 대기 중인 사람의 눈빛이 아니라는 걸, 나는 직감으로 알아챘다.
"영애,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국왕의 목소리가 무겁게 떨어졌다. 나는 입을 열려 했지만, 재현의 겁먹은 눈과 다은의 떨리는 어깨가 자꾸 눈앞을 가로막았다. 증거를 꺼내면, 이헌의 죄를 밝힐 수는 있겠지만 그 대가로 동생들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었다. 저 자식이 재현과 다은한테 손끝 하나라도 대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아니, 그걸 알기 전에 아이들이 다칠 거다.
숨이 턱 막혔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들, 두 달 동안 준비한 증거, 굶주린 아이의 얼굴, 이장의 떨리는 목소리, 모든 게 지금 이 순간 물거품이 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재현과 다은을 지키는 게 먼저였다. 정의고 뭐고, 지금 이 순간 저 두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할 말이 없습니다."
결국 나는 그렇게 답했다. 알현실 안이 순간 조용해졌고, 이헌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치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저 새끼, 이길 걸 알고 있었구나. 저 미소가 말해주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판을 이렇게 짜놨다고. 침묵을 선택하는 순간 나는 이미 악녀라는 낙인을 자처한 거였고, 그걸 알면서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국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나는 이 재판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흘러갈 거라는 걸 직감했다. 증거는 소매 안에서 여전히 꺼내지지 못한 채였고, 그 무게가 그날 이후로도 오래도록 나를 짓누를 것 같았다.
국왕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이제 무슨 말이 나올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판결일까, 아니면 더 지독한 함정일까. 알현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걸 느끼며,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