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짜 난민, 진짜 용신사제

5화

그 한마디가 성문 앞 광장을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병사들의 창끝이 흔들렸고, 신도현은 부러진 검을 손에 든 채 그대로 얼어버렸다. 아자마저도 화염을 거두고 원래 크기로 돌아와 조심스럽게 내 발밑으로 다가왔다. 광장 전체를 감싸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신 낯선 정적이 자리를 채웠다. 숨소리마저 죄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침묵이었다. "용족의 마력이라니, 지금 무슨 말씀을···." 신도현이 겨우 목소리를 냈지만 노인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내 얼굴만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얼마나 집요했는지,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현담 대마법사님···?" 주변 병사 하나가 그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대마법사라는 직함이 나오자 광장 분위기가 다시 한 단계 더 무거워졌다. 통령의 아들 앞에서도 오만했던 병사들이 이 노인 앞에서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창을 쥔 손에 힘이 빠지고, 등이 자연스럽게 굽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대마법사 현담. 이름은 들어본 적 있다. 파사성 최고위 마법사 중 하나다. 마탑의 원로원에 이름을 올린 자였지.' 혈염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이 잔재가 조심스러운 걸 보니 이 노인, 진짜로 대단한 존재인 모양이었다. 평소 같으면 아무 존재나 다 하찮게 여기던 그 오만한 목소리가 이렇게 조심스럽게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답이었다. 현담이라 불린 노인은 내 앞에 서서 다시 한번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빛이 내 가슴 근처를 다시 훑고 지나갔다. 그 빛이 스칠 때마다 살갗이 미묘하게 저릿거렸다. 마력을 읽어내는 감각이라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황금성룡족과 변이 혈룡, 두 존재의 흔적이 동시에 남아 있다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었다. 대마법사라는 사람이, 광장 한복판에서, 나를 향해서. "이럴 수가···." "현담님!" 주변에서 놀란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신도현도 검을 놓칠 뻔했다. 손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간 듯, 부러진 검이 바닥에 부딪히며 쨍그랑 소리를 냈다. 나 역시도 이 상황이 뭔지 이해가 안 갔다. 방금까지 난민 취급받으며 침 뱉음을 당하던 내가, 이제는 파사성 최고위 마법사가 무릎을 꿇는 대상이 되어 있었다. 어제까지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뭐가 달라졌길래 이런 극적인 낙차가 생기는 건지, 머릿속이 잠시 하얘졌다. "용신사제···. 소멸했다던 용신께서 계승자를 남기셨을 줄이야." 용신사제. 처음 듣는 호칭이었다. 태고가 말했던 '용신의 계승자'라는 말과 비슷한 맥락 같았는데, 이렇게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불리게 될 줄은 몰랐다. 속으로는 이거 왠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저, 저기요. 일단 일어나시죠."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시선을 끌면 좋을 게 없었다. 조용히 성 안에 들어가서 잡일이나 하며 지낼 계획이 이미 산산조각 난 상황이었다. 그 소박한 계획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이야. 현담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노인의 눈동자에는 광기에 가까운 경외와, 그와는 별개로 지극히 이성적인 계산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그 이질적인 조합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용신사제님. 그 몸에 남은 마력의 파동, 파사성 전체가 느꼈을 것입니다. 이미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이해했다. 방금 아자가 화염을 뿜었을 때, 그리고 현담이 그걸 억누를 때, 이 광장 전체에 마력의 파동이 퍼졌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파동의 진원지가 나라는 것도. 조용히 숨어 지내겠다는 계획이 시작하자마자 이런 식으로 발각될 줄은 몰랐다. 하필 첫날부터. 신도현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뒷걸음질쳤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용신사제라니···. 그, 그럼 방금 제가···." 그가 신을 상대로 검을 뽑은 셈이었다. 표정이 하얗게 질려가는 게 보였다. 아까까지의 오만함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통령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이 상황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 신분이 더 큰 죄를 만든 꼴이었다. "현담님, 이게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다른 병사가 물었다. 목소리에 두려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현담이 천천히 일어서며 답했다. 무릎을 꿇었던 자세에서 일어서는데도 위엄이 흐트러지지 않는 게 신기했다. "수백 년 전 소멸했다던 황금성룡족의 족장 태고, 그리고 변이 혈룡 혈염. 이 두 존재의 흔적이 이 청년의 몸에 남아 있다. 이는 용신께서 직접 후계를 지정하신 증거다." 말투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반박할 여지도 주지 않는 어조였다. 병사들 사이에서 낮은 탄식과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몇몇은 무릎을 꿇으려는 자세를 취하다가 눈치를 보며 멈추기도 했다. 그 우스운 광경을 보며 나는 그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계산하기 시작했다. 좋은 점: 갑자기 신분이 급상승했다. 난민에서 신격화된 존재로. 배고픔 문제도 아마 이제는 걱정 없을 거다. 잠잘 곳도, 먹을 것도 이제는 알아서 굴러들어올 것 같았다. 나쁜 점: 이제부터 이 도시 전체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될 것이다. 조용히 살고 싶었던 계획은 완전히 물 건너갔다. 신격화된 존재로 산다는 게 편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매 순간 감시당하는 삶이 될 확률이 훨씬 높았다. '축하한다고 해야 할지, 위로한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혈염이 중얼거렸다.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좋다고 해야 할지 최악이라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상황이었다. 현담이 손을 내밀었다. 주름진 손이었지만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온기는 결코 늙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용신사제님, 저와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이 소식이 퍼지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 합니다." 안전이라는 말이 묘하게 걸렸다. 보호라는 명목이었지만, 그 말 뒤에 뭔가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검증, 혹은 통제. 아니면 그냥 이용할 방법을 찾는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받아들여라. 지금 상황에서 저 노인의 손을 잡지 않으면 더 위험해진다. 이미 파사성 전체가 너를 주목하고 있으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도망친다고 해도 소용없다는 걸 너도 알겠지.' 혈염의 말이 맞았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이미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나는 현담의 손을 잡았다. 손끝에서 따뜻한 마력이 흘러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온기가 안심을 주는 동시에, 어딘가 낚싯줄에 걸린 것 같은 불안한 기시감을 남겼다. "잘 결정하셨습니다." 현담이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이 어딘가 안심되면서도, 동시에 뭔가를 재는 듯한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보호자인지 감독관인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아자가 다시 내 어깨 위로 뛰어올랐다. 방금까지의 시험은 다 끝났다는 듯, 원래의 애정 표현으로 돌아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따뜻한 콧김이 목에 닿는 감각이 그나마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익숙한 온기였다. 현담이 몸을 돌려 광장을 벗어나려는 순간, 그의 뒤에서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검은 로브를 입은 인물이 광장 한쪽 그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은 후드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 시선만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살가죽 아래를 훑는 듯한, 불쾌할 정도로 정확한 시선이었다. "현담님, 저자는 누구입니까?" 내가 물었지만 현담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 짧은 굳음이 오히려 더 많은 걸 말해주고 있었다. "대주교님의 사람입니다. 이미 소식이 그쪽까지 전해진 모양이군요." 대주교. 시놉이 아니라 이 세계 사람들 입에서 처음 나온 그 단어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종류의 압박으로 다가왔다. 대마법사도 무릎을 꿇게 만드는 존재가 이제 등장했으니, 그 위에는 또 뭐가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검은 로브의 인물이 짧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마치 볼 건 다 봤다는 듯한 태도였다. 발걸음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경고처럼 느껴졌다. 현담이 낮게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빨리 눈에 띄었군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용신사제님."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나를 데리고 광장을 벗어났다. 뒤에서 병사들의 시선이 계속 따라붙는 게 느껴졌고, 신도현은 여전히 부러진 검을 손에 든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나는 그저 어깨 위 아자의 온기를 느끼며, 이 갑작스러운 신분 상승이 앞으로 나를 어디로 끌고 갈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검은 로브가 사라진 그늘 쪽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지만, 이미 그곳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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