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짜 난민, 진짜 용신사제

1화

눈을 뜨기 전부터 이상하다는 건 알았다. 몸이 없었다. 정확히는 몸이 있는데 그 몸이 내 것인지 확신이 안 섰다.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로 나는 어둠 속에 매달려 있었고, 그 어둠 저편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숨을 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폐가 있기는 한 건지, 심장이 뛰고는 있는 건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냥 존재한다는 감각만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깨어났느냐, 계승자여.]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겹겹이 쌓인 소리가 동시에 울렸는데, 그중 하나는 황금빛으로, 다른 하나는 핏빛으로 느껴졌다. 색깔로 목소리를 구분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그때는 그게 제일 정확한 표현이었다. 눈앞에 형상이 맺혔다. 거대한 용 두 마리였다. 하나는 온몸이 황금 비늘로 덮여 있었고, 다른 하나는 붉다기보다는 검붉은, 상처 딱지 같은 색이었다.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감도 안 왔다. 어둠 자체가 그 몸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으니까. 황금빛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황금성룡족의 태고이니라. 이쪽은 혈염, 변이한 나의 벗이다.] [···미안하다.] 혈염이라 불린 붉은 용은 그 한마디만 하고 고개를 떨궜다. 사과할 일이 뭔지는 몰랐지만 분위기상 물어볼 틈이 없었다. 애초에 물어본다고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는 곧 소멸한다.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불을 껐다. 그러나 마지막 힘을 너에게 남긴다.] 그러니까 죽어가는 용 두 마리가 죽기 직전에 내 몸에 뭔가를 부어넣겠다는 소리였다. 좋은 소린지 나쁜 소린지 판단이 안 섰는데, 판단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거다. 애초에 물어보는 형식조차 아니었으니까. 빛이 쏟아졌다. 뜨겁다기보다는 무거웠다. 뼈마디 하나하나가 새로 조립되는 느낌이었고, 심장이 한 번 멈췄다가 다시 뛰는 것 같은 순간도 있었다. 혈관 속으로 뭔가 굵은 게 흘러 들어오는 감각이 들었다. 피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원래 있던 걸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견뎠다. 견디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몸 안쪽 어딘가에서 뭔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뼈인지 다른 무언가인지 구분이 안 됐다. 그리고 그 균열 사이로 낯선 온기가 스며들었다. 황금빛이 뜨겁게, 핏빛이 서늘하게, 서로 다른 방향에서 동시에 밀려들었다. [너는 용신의 계승자가 될 것이다. 파사성으로 가거라. 그곳에 너를 알아볼 자가 있을 것이다.] [미안하다···. 우리가 좀 더 버텼다면···.] 두 목소리가 동시에 흩어졌다. 황금빛과 검붉은빛이 서로 섞이며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딱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이름이라도 좀 제대로 알려주고 가지. 파사성이 어디 붙어 있는 동네인지, 나를 알아본다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아무것도 안 알려주고 사라지면 나는 뭘 어쩌라는 건지. 어둠이 완전히 걷히기 전, 마지막으로 붉은빛 하나가 아주 작게 남아 있는 걸 본 것 같았다. 그때는 눈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느낀 건 배고픔이었다. 용신이니 계승자니 하는 거창한 말들이 방금 귓속에서 흘러나왔는데, 몸이 반응하는 건 그저 허기였다. 사람이 참 어이없게도 실용적이구나 싶었다. 우주적인 사명이니 뭐니 해도 위장은 그런 거 신경 안 쓴다. 주변은 숲이었다. 나무들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으로 자라 있었다. 줄기가 나선형으로 꼬여 올라가는 게 있었고, 잎사귀 색이 초록보다는 청록에 가까운 것도 있었다. 하늘의 색도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다. 원래 있던 세계와는 다르다는 확신이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별로 놀랍지 않았다. 놀랄 기력조차 배고픔에 다 뺏긴 것 같았다. 일어서려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다시 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잠깐 숨을 골랐다.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낯선 감각이 아직 남아 있었다.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사이즈는 맞는데 어색한 그런 느낌.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보니 익숙한 이목구비였다. 코도 그대로, 광대도 그대로. 다행이다 싶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근처 웅덩이에 비친 얼굴을 보니 눈동자 색이 미묘하게 금빛과 붉은빛이 섞여 있었다. 이거 컬러렌즈 낀 것도 아니고. 가까이서 들여다볼수록 더 이상했다. 동공 안쪽에서 두 색이 서로 자리를 다투듯 흔들리고 있었다. 황금빛이 조금 더 우세해 보이다가, 다음 순간엔 검붉은빛이 슬며시 밀고 들어왔다. 마치 눈동자 안에서도 그 두 용이 계속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용 두 마리가 죽으면서 나한테 뭔가를 남겼다더니, 이게 그 증거인가 싶었다. 몸 상태를 이리저리 확인해봤다. 팔 힘이 예전보다 훨씬 세진 것 같았고, 넘어졌던 자리의 상처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아무는 게 보였다. 손톱 밑에 박혀 있던 작은 가시 자국도 몇 초 만에 사라졌다. 나쁘지 않은 개조였다. 문제는 이 힘으로 당장 먹을 걸 구할 수 있는가였다. 시력도 좀 이상해졌다. 나무 사이로 멀리 있는 나뭇잎의 잎맥까지 또렷이 보였다. 예전 같으면 초록색 뭉텅이로만 보였을 거리였다. '제법 쓸 만한 그릇이로군.' 뭔가가 머릿속에서 말을 걸었다. 놀라서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목소리는 안쪽에서, 정확히는 가슴 언저리에서 울리고 있었다. 심장 바로 옆, 딱 그 자리에서 뭔가가 웅크리고 앉아 말을 거는 느낌이었다. '놀라긴. 나다, 혈염. 완전히 소멸하진 못했다. 잔재라고 해두지.' "방금 소멸한다고 하지 않았나?" 입 밖으로 말하고 나서야 이게 정상적인 대화 방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다행히 주변엔 아무도 없어서 미친놈처럼 보일 일은 없었다. 나무한테 말 거는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목격자가 없으니 상관없었다. '말이 많아진다. 어쨌든 완전히는 아니다. 태고 님은 완전히 흩어지셨지만 나는 좀 더 미련이 많은 성격이라서.' "미련이 많다는 게 자기 입으로 할 소린가." '적어도 솔직하지 않느냐. 태고 님은 고결하신 분이라 미련 같은 거 안 남기고 깔끔하게 사라지셨지만, 나는 좀 추접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붙어 있게 됐다.' 솔직한 건 좋은데, 내 가슴 속에 붙어 있는 게 추접스러운 용의 잔재라는 사실은 별로 반갑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 대화 상대가 있다는 건 나쁘지 않았다. 혼자 숲 한복판에서 미쳐가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그래서 지금 뭘 하고 싶은데." '배고프지 않느냐. 그거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 정확한 지적이었다. 배 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초인적인 신체를 얻었어도 위장은 여전히 사람 것인 모양이었다. 뭔가 대단한 능력을 각성하는 서사를 기대했는데 현실은 굶주림이 먼저였다. 이게 말이 되나 싶으면서도, 딱히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라. 배부터 채워야 나머지 힘도 제대로 쓸 수 있느니라. 굶은 그릇에는 아무리 좋은 술을 담아도 넘친다.' "용도 배고픈 거 겪어봤어?" '···말이 많아진다.' 대답을 회피하는 걸 보니 뭔가 있는 모양이었다. 더 캐물을까 하다가 그만뒀다. 지금은 그것보다 당장 뭘 먹을지가 더 중요했다. 일어서서 숲 속을 걸었다. 다리에 힘이 좀 붙었는지 아까보단 걸음이 안정적이었다. 발밑의 흙냄새가 유난히 진하게 느껴졌다. 후각도 달라진 모양이었다. 예전엔 그냥 흙냄새였는데 지금은 그 안에 섞인 낙엽 썩는 냄새, 어딘가에서 흐르는 물냄새까지 따로따로 구분이 됐다. 나무 사이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처음엔 사람인가 싶어 반가웠는데, 그 인기척의 크기가 사람보다 훨씬 작았다. 작고, 붉은빛이 도는 눈동자가 나무 그늘 사이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숨소리가 짐승 특유의 거친 리듬으로 들렸다. 사람이 아니었다. 크기는 작았지만 웅크린 자세에서 뭔가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게 보였다. 언제든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였다. 짐승인지 뭔지는 몰라도 딱 하나 확실한 건 있었다. 저놈도 지금 나를 먹잇감으로 보고 있다는 것. '저건···.' 혈염의 목소리가 갑자기 뭉개졌다. 방금 전까지 능글맞게 말을 걸던 놈이 갑자기 말을 흐리는 게 심상치 않았다. "뭔데, 아는 놈이야?" 대답이 없었다. 가슴 언저리에서 느껴지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나무 그늘 속의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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