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짜 난민, 진짜 용신사제

3화

성문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돌로 쌓은 벽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고, 성벽 위로는 창을 든 병사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높이에서 떨어지면 즉사겠구나, 하는 쓸데없는 계산이 먼저 들었다. 그 아래로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상인, 순례자, 그리고 남루한 옷을 입은 이들까지 다양했다. 마지막 무리 근처에 슬쩍 끼어드는 게 내 계획이었다. 줄은 길었다. 상인들 줄에서는 마차 바퀴가 자갈 위를 구르는 소리와 짐꾼들이 부대끼는 소리가 요란했고, 순례자들 줄에서는 낮게 읊조리는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줄, 남루한 옷을 입은 이들의 줄은 조용했다. 조용해서 더 눈에 밟혔다. 아자는 어깨에서 내려와 옷 속으로 숨어들었다. 짹짹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잡는 걸 보니 눈치가 빠른 짐승이었다. 배 속에서 조그맣게 웅크린 온기가 느껴졌다. 이 상황을 이해하고 숨은 건지, 그냥 졸린 건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긴장하지 마라. 몸에서 냄새가 난다.' 혈염이 대뜬 한마디 했다. 냄새라니. 사흘 굶은 사람한테 냄새 얘기를 하는 게 지금 할 소리인가 싶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줄이 줄어들면서 내 차례가 왔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 하나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정확히 삼 초. 표정에서 이미 어떤 판단이 끝나 있었다. "난민이군." 질문이 아니라 확정이었다. 반박할 필요도 없었다. "···네. 마을이 무너져서 갈 곳이 없습니다." 연습도 안 한 대사였는데 입에서 술술 나왔다. 목소리까지 살짝 떨리게 만들었는데, 그건 연기가 아니라 진짜 배가 고파서 나온 떨림이었다. 혈염이 자꾸 거짓말 재능을 칭찬한 게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병사는 귀찮다는 듯 손짓을 했다. 그런데 그 손짓이 곱지 않았다. 손등으로 파리를 쫓는 듯한 동작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 손짓의 무례함을 계산했다가, 곧 그런 걸 계산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쪽으로 붙어." 난민 줄이라는 게 따로 있었다. 성문 한쪽 구석, 다른 이들보다 훨씬 좁고 지저분한 통로였다. 바닥에는 오물인지 흙탕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것들이 말라붙어 있었고, 발을 디딜 때마다 신발 바닥에 뭔가 들러붙는 느낌이 났다. 거기 서 있던 사람들의 눈빛도 곱지 않았고, 지나가는 시민들의 눈빛도 곱지 않았다. "저기 또 오는군." "밥이나 축내려고 오는 거지."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시하려고 했는데, 그중 하나가 대놓고 침을 뱉었다. 침이 내 발 앞에 떨어졌다. 정확히 발끝에서 한 뼘. 우연이 아니었다. 속으로 셈을 했다. 저 침 뱉은 놈 얼굴에 저 침을 도로 돌려줄 방법이 몇 가지나 되는지, 그리고 그중 몇 가지가 지금 계획을 완전히 망치지 않는지. 답은 없었다. 전부 다 망치는 방법뿐이었다. '참아라. 여기서 문제 일으키면 계획이 다 어그러진다.' 혈염의 말이 맞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냥 넘어갔다. 이 정도 모욕은 굶주림보다는 참을 만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줄이 다시 줄어들었다. 앞에 서 있던 노인이 병사에게 무언가를 항의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짐작으로는 순서가 뒤바뀌었다거나 뭔가 서류 문제가 있는 듯했다. 병사는 대꾸도 하지 않고 발로 노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노인은 바닥에 쓰러졌다. 주변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도와줬다가는 내 계획이 통째로 끝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 사실이 스스로 얼마나 형편없게 느껴지는지와는 별개로. "다음." 내 차례였다. 다른 병사가 서류 같은 걸 훑어보며 물었다. 손끝에 잉크가 잔뜩 묻어 있었고, 글씨 쓰는 속도가 놀랍도록 빨랐다. 하루에 이런 사람을 몇백 명씩 처리하는 모양이었다. "할 줄 아는 일은?"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가장 안전한 대답이었다. 특기가 있다고 하면 캐물을 것이고, 캐물으면 거짓말이 늘어날 것이고, 거짓말이 늘어나면 언젠가 앞뒤가 안 맞을 것이다. 뭐든 하겠다는 대답은 아무것도 캐묻지 않게 만드는 마법의 말이었다. "성문 근처 하역 일이 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자리인데, 할 텐가?" "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순조로웠다. 배도 채우고, 성 안에 발을 들일 수 있는 명분도 생기고. 위험도 낮은 잡일이라는 게 딱 원하던 그림이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자도 그걸 느낀 건지 배 속에서 살짝 몸을 뒤척였다. '생각보다 쉽게 풀리는군.' 혈염조차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불길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서류를 정리하던 병사 뒤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옷차림부터 다른 이들과 확연히 달랐다. 값비싼 천으로 짠 옷에, 허리에는 장식이 화려한 검이 걸려 있었다. 걸음걸이에도 여유가 넘쳤는데, 그 여유가 자기 돈으로 산 게 아니라 남에게 받은 대접에서 나온 여유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뭐 하는 놈이냐." 목소리에 짜증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위쪽으로 보였는데, 태도는 나이와 상관없이 오만했다. 저런 얼굴은 어디서나 똑같구나 싶었다. 세계가 바뀌어도 재수 없는 얼굴의 공식은 안 바뀌는 모양이었다. "통령님 아들···?" 주변 병사들이 순식간에 자세를 고쳐 잡았다. 서류를 쓰던 병사는 손에 든 펜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 반응만으로도 이 청년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저놈이다.' 혈염이 짧게 말했다. 무슨 뜻인지 물어볼 시간도 없었다. "난민 나부랭이가 하역 일을 하겠다고? 웃기는군." 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 나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봤다. 눈빛에 경멸이 가득했다. 그 눈빛을 받으면서 나는 속으로 하나만 생각했다. 이 자식 검 무게가 얼마나 될까. 별로 안 무거워 보이는데. "···맡은 일이나 하러 온 겁니다." 최대한 정중하게 답했다. 정중함이 통할 상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시도는 해야 했다. 사람을 상대로 하는 흥정은 언제나 저쪽이 원하는 그림을 조금이라도 맞춰주는 데서 시작하는 법이다. "말투가 곱지 않군. 감히 존댓말 반쪽만 쓰면서 대드는 건가?" 말도 안 되는 트집이었다. 존댓말을 다 쓰고 있었는데도 저리 나오면 이건 그냥 시비였다. 저놈은 처음부터 시비 걸 이유를 찾고 있었을 뿐, 내 말투는 안중에도 없었을 거다. '저건 그냥 심심한 거다.' 혈염이 냉정하게 진단을 내렸다. 그 진단이 도움이 되진 않았다. 주변에 몰려 선 난민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이런 상황을 몇 번 봤는지, 뒤로 빠지는 속도가 놀랍도록 빨랐다. 나만 그 속도를 못 맞추고 그대로 서 있었다. 어깨 안쪽에서 아자가 조금씩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뭔가 반응하려는 듯한 기미였다. 나오지 마라, 제발. 지금 나왔다가는 진짜 답이 없다. "저기 서류 처리한 놈이 누군데?" 청년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서류를 쓰던 병사가 새파랗게 질려서 대답했다. "그, 그게···하역 일을 배정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이런 놈한테 하역 일을 왜 줘? 저 배경 없는 놈들이 성 안에 들어와서 뭘 하는지 알아? 밥이나 축내고 도둑질이나 하고 다니지." 편견의 종합 선물세트를 듣고 있었다. 반박할 가치도 없었고, 반박할 처지도 아니었다. '참아라. 저 청년, 뒤로 보이는 배경이 심상치 않다.' 혈염이 다시 경고했다. 참으려고 했다. 정말로 참으려고 했는데, 그가 손을 뻗어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어디서 이런 걸레 같은 걸 걸치고 성 안에 들어오려는 거야. 냄새 나잖아." 손이 옷을 잡아채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그 손목을 붙잡았다. 생각보다 세게 잡은 모양이었다.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이 자식이···!" 주변 병사들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나도 놀랐다. 이렇게까지 세게 힘이 들어갈 줄은 몰랐다. 개조된 몸의 힘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손목뼈가 손끝에 그대로 만져지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정확히 하면 안 되는 일이라는 것도 동시에 알았다. 그가 허리춤의 검을 뽑으려는 순간, 나는 그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주변 병사들의 창끝이 일제히 내게 향했다. 창날이 빛을 받아 번쩍였다. 그 숫자를 순간적으로 셌다. 여섯. 여섯 자루의 창이 나 하나를 향해 있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몸이 개조됐다 해도 승산이 안 좋았다. "칼 뽑기 전에 손 놓는 게 좋을 텐데." 말투가 어느새 존댓말에서 반말로 바뀌어 있었다. 이 순간, 나는 알아야 했다. 이 사소해 보이는 잡일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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