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짜 난민, 진짜 용신사제

2화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도망칠지 싸울지 계산했다. 계산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었다. 다리가 아직 후들거리는 상태였고, 상대는 크기가 내 종아리만 한 작은 짐승이었다. 그런데도 등줄기가 서늘했다. 몸집으로 판단할 상대가 아니라는 감이 왔다. 숲의 공기는 축축했고, 발밑에서는 썩은 나뭇잎 냄새가 올라왔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희미했지만, 그 짐승의 눈만은 유독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 박아 넣은 작은 화로 같았다. '조심해라. 저건 화계 마수다. 최소 4단계는 되어 보이는군.' 혈염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4단계가 뭔지 몰랐지만 다급한 말투로 미루어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4단계가 뭔데." '인간 기준으로 치면 중급 기사 셋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는 수준이다. 저 몸집에 속으면 안 된다.' "기사 셋이면... 나 하나로는 안 되겠네." '네가 그걸 이제 알았느냐.' 혈염이 한심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애초에 이 몸에 들어온 지 며칠도 안 됐는데 무슨 근거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겠는가. 짐승은 자주색 털을 가진 쥐였다. 크기만 컸지 생김새는 확실히 쥐였는데, 눈동자에서 불씨 같은 것이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를 보며 코를 킁킁거리는 모습이 어딘가 귀엽기도 했지만, 그 귀여움과 상관없이 몸속 어딘가에서 경계 신호가 울렸다. 털끝이 살짝 곤두선 걸 보니 저놈도 나를 재는 중인 듯했다. 서로 눈치를 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심장이 더 크게 뛰었다. 이럴 땐 먼저 움직이는 쪽이 진다는 걸 어디서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짐승이 먼저 움직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다. 쩌엉, 하는 소리와 함께 팔뚝에 불이 옮겨붙는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뜨거웠다. 그런데 타지는 않았다. 시야 한쪽이 확 밝아질 정도로 강렬한 열감이었는데도, 소매에 그을음조차 남지 않았다. 이상했다. 몸이 알아서 뭔가를 걸러내는 느낌이었다. '네 몸은 이제 마법에 완전히 면역이다. 화계 마수의 불꽃도 그저 열감으로만 느껴질 것이다.' 혈염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기가 만든 몸이니 저럴 만도 했다. 나는 그 정보를 확인이라도 하듯 팔을 살펴봤다. 정말로 상처 하나 없었다. 그저 뜨거운 느낌만 남아 있었다. "그럼 화계고 뭐고 다 이렇게 막을 수 있는 거야?" '마법으로 만들어진 공격이라면 그렇다. 순수한 물리력은 별개다. 저놈이 이빨로 물어뜯으려 들면 그때는 네 뼈다귀가 진짜로 부러질 거다.' "위로가 되네, 정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안도했다. 적어도 불에 타 죽을 걱정은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남는 장사였다. 쥐는 공격이 통하지 않자 잠시 멈춰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신기하다는 듯 코를 다시 킁킁거렸다. 앞발을 들어 제 얼굴을 슥슥 문지르는 모습이,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헤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너, 나 못 태우는구나." 말을 걸었다는 게 웃겼다. 짐승이 말을 알아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앞으로 조금 더 다가왔다. 적의가 사라진 눈빛이었다. '저놈도 지능이 있는 종류다. 4단계 이상은 어느 정도 인간 언어를 이해하지.' "그럼 대화가 되는 건가?" '대화라기보다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이다. 인간 말로 복잡한 협상을 하려 들지는 마라.' "복잡한 협상은 필요 없지. 그냥 친구 하자고 하면 되잖아." '네 그 대책 없는 낙천성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 혈염이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투로 물었지만 나는 답하지 않았다. 대책이 없어서 낙천적인 게 아니라, 낙천적이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어서였다. 시험해보기로 했다. 손을 뻗어 짐승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쥐는 처음엔 경계했지만 곧 눈을 가늘게 뜨고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손끝에 닿는 털은 놀랍도록 부드러웠고, 그 밑으로 미열이 은은하게 배어 나왔다. 마치 갓 구운 빵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너 이름 있어?" 쥐가 대답할 리는 없었다. 그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앞발로 내 손등을 두 번 톡톡 두드렸다. 뭔가 계약이라도 하자는 듯한 몸짓이었다. '설마 진짜로 이름을 지어줄 생각이냐.' "왜, 안 돼?" '되긴 하는데... 이름을 준다는 건 나름의 인연을 만드는 행위다. 저런 부류는 한 번 이름이 붙으면 어지간해서는 안 떨어진다.' "떨어지면 안 되는 거 아니었어? 나는 밥 얻어먹으려고 하는 건데." '···그 실용성 하나는 인정한다.' "아자." 왜 그 이름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입에서 나왔다. 발음이 편해서였는지, 아니면 이 짐승의 분위기가 딱 그랬는지. 뭔가 거창한 이유를 붙이고 싶었지만 솔직히 그런 건 없었다. 쥐, 이제는 아자가 된 그 짐승은 이름을 듣자마자 신이 난 듯 내 어깨 위로 뛰어올랐다. 무게가 제법 있었는데도 균형은 잘 잡았다. 어깨에 얹힌 무게가 묘하게 든든했다. 마치 갑옷을 하나 더 걸친 느낌이었다. '뭐 하는 거냐, 지금.' "동료 하나 얻은 거지. 배고픈데 이놈이 불이라도 피워주면 좋잖아." '···그런 계산이었나.' "당연하지. 세상에 공짜는 없어. 이놈도 나 따라다니면 뭔가 얻는 게 있을 거고." '뭘 얻는다는 거냐.' "몰라. 아마 재밌는 인간 구경?" 혈염이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실용적인 게 뭐가 나쁜가. 어차피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손잡을 상대는 손잡아야 했다. 화계 마수든 뭐든, 등을 맞대줄 존재 하나가 더 있다는 건 나쁘지 않았다. 아자는 내 어깨 위에서 신나게 꼬리를 흔들었다. 꼬리가 볼을 스칠 때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낯선 세계에 떨어진 지 며칠 만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온기였다. 그러다 갑자기 코를 쳐들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숲 저편, 나무들 사이로 흐릿하게 성벽 같은 것이 보였다. "저게 뭐야?" 아자가 짹짹거리는 소리를 냈다. 말은 못 해도 몸짓으로 대충 알 수 있었다. 저곳이 사람 사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파사성이다. 태고 님이 말씀하신 그곳이겠지. 너를 알아볼 자가 있다던.' "거기 가면 진짜 뭔가 나오는 거야?" '모른다. 하지만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지겠지.' 굶어 죽는 것보다 나은 선택지라는 말이 뭔가 위로가 되면서도 서글펐다. 선택의 기준이 그 정도로 낮아졌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밥도 먹고 정체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저 성벽 너머로 어떻게 들어가느냐였다. 낯선 세계에 아무 신분증도, 아무 증명도 없이 나타난 청년을 순순히 받아줄 곳은 없을 터였다. "들어가는 방법이 있을까?" 혈염이 잠시 침묵했다가 답했다. '거짓말을 잘하는 편이더군, 너는.'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이 몸에 들어온 이후로 유독 감이 좋아진 게 있다면 사람을 속이는 요령이었다. 원래 세계에서도 그런 재주는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게 왜 더 날카로워졌는지 알 수 없었다. "거짓말로 뭘 하라는 건데." '난민 행세를 하거라. 이 근방엔 위험지대가 늘어서 마을을 잃고 떠도는 자들이 많다. 성문 근처에서 잡일이라도 하겠다고 나서면 의심 없이 받아줄 것이다.' "그럼 아자는 어떻게 하고? 이 쥐를 어깨에 얹고 들어가면 다들 이상하게 볼 거 아냐." '화계 마수를 부리는 난민은 흔치 않지. 오히려 그게 네 신빙성을 더해줄 수도 있다. 사람들은 특별한 걸 보면 이유를 만들어내는 법이니까.' "위험하지 않을까? 저 정도 마수를 데리고 다니면 잡아 가둔다거나..." '가둘 수 있으면 이미 잡았겠지. 4단계 마수를 상대로 그 짓을 시도할 만한 자들이 이런 변경 성에 있을 리 없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게다가 지금 이 상황에서 아자를 떼어놓을 방법도 없었다. 이미 내 어깨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내려갈 생각을 안 하고 있었으니까. 합리적인 계획이었다. 저위험, 저비용, 배도 채울 수 있는 방법. 이보다 완벽한 계획이 있을까 싶었는데, 그 순간 나는 알아야 했다. 완벽한 계획일수록 뒤에 숨겨진 함정이 크다는 걸. "좋아. 성문으로 가자." 아자가 어깨 위에서 짹 하고 울었다. 동의의 표시인지, 그냥 기분이 좋아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걸음을 옮기며 나는 속으로 시나리오를 짜기 시작했다. 어디서 왔다고 할지, 가족은 어떻게 됐다고 할지, 아자는 어디서 주웠다고 할지. 거짓말도 준비가 필요한 법이었다. 대충 지어낸 이야기는 금방 들통나기 마련이니까. '너 지금 표정이 아주 그럴싸하다. 벌써 준비가 된 모양이군.' "이 정도는 기본이지. 살려면 뭐든 해야 하잖아." '그 재주는 정말 어디서 배운 거냐.' "글쎄, 그건 나도 몰라." 정말로 몰랐다. 이 세계에 오기 전의 기억은 흐릿했고, 지금은 그저 몸에 새겨진 감각만이 나를 이끌고 있었다. 그게 어디서 왔는지 따져볼 여유는 없었다. 당장 배가 고팠고, 성벽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우리는 파사성으로 향했다. 배고픔을 해결하겠다는 아주 단순한 목적으로 시작한 걸음이었다. 성문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짐수레가 지나가는 소리, 상인들이 흥정하는 소리, 아이 우는 소리. 그 소음이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저 안에서 내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성문 앞에는 창을 든 병사 두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멀리서부터 나를 훑는 것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내 어깨 위에 얹힌 자주색 털뭉치를 향한 시선이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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