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누이가 된 첫사랑

5화

방문을 연 사람은 박지현 씨였다. 그녀는 문 앞에서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손잡이를 잡은 손끝이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등이 벽에 닿는 것도 몰랐다. 그 바람에 서연이가 잠에서 깼다. 그녀는 눈을 비비며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잠이 덜 깬 눈이 몇 번이나 나와 박지현 씨 사이를 오갔다. 박지현 씨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웃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쯘가에 걸린 얼굴이었다. 나는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급한 동작에 이불이 발치로 흘러내렸다. 어젯밤에, 방이 무섭다고 해서, 그게. 나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문장이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다. 입술이 말라서 자꾸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서연이가 나서서 말했다. 엄마, 제가 부탁한 거예요. 저 혼자 못 자는 거 아시잖아요. 목소리는 또박또박했지만 손끝은 이불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박지현 씨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몇 초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몇 분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짧게 숨을 내쉬며 문을 닫았다. 알겠어, 일단 나와서 얘기하자. 그 목소리에는 나무람보다는 걱정이 더 짙게 깔려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다리가 풀려서 하마터면 다시 침대 위로 주저앉을 뻔했다. 거실로 나가자 아버지도 이미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소파 팔걸이에 팔을 얹은 채,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략 전해 들은 표정이었다. 나는 소파 끝에 앉아 무릎만 내려다보았다. 카펫 무늬가 유난히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박지현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연이가 원래 그런 습관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혼자 자는 걸 힘들어했거든요. 그래도, 이건 좀.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나를 힐끗 보았다. 그 시선이 비난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괜히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죄송해요. 저도 처음엔 안 된다고 했는데. 나는 겨우 그 말을 꺼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아버지가 손을 들어 나를 막았다. 아니, 네 잘못이 아니야. 상황이 그렇게 된 거지. 아버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나는 그 말에 오히려 더 어깨가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뭔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오늘 안에 접이식 침대를 사기로 결정됐다. 아버지가 바로 인터넷 주문을 넣었고, 오후에 배송된다는 답이 왔다. 화면을 넘겨 보며 아버지가 몇 개의 제품을 나에게 보여줬다. 이건 어때, 이건 좀 얇은 것 같고. 나는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사실 어떤 게 좋은지 판단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 사이 서연이는 소파에 앉아 조용히 시리얼을 먹으며 나를 힐끗거렸다. 숟가락이 그릇 바닥을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죄송해요, 오빠. 저 때문에 이상한 상황 됐죠. 그녀가 작게 말했다. 아니야. 나는 짧게 대답했다. 오빠라는 호칭이 이제는 조금 자연스럽게 들렸다. 그 사실이 스스로도 이상했다. 어제까지는 그 단어가 낯설고 무겁게 느껴졌는데, 하룻밤을 지나며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마치 몸에 맞지 않던 옷이 하루 입고 나니 조금은 편해진 것처럼. 그런데도 마음 한쪽은 여전히 그 옷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오후에 접이식 침대가 도착하고, 나는 방 한쪽 구석에 그것을 펼쳤다. 다리를 접었다 펴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좁긴 했지만, 소파보다는 훨씬 나았다. 매트리스에 손바닥을 눌러보니 그럭저럭 단단했다. 이제 이런 문제는 없겠지.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안도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알 수 없는 서운함도 함께 자리 잡았다. 그 이유를 굳이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그냥 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시 멀어진 것뿐인데, 왜 이렇게 허전한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학교에 가는 길이 처음으로 달라졌다. 나는 서연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같은 방향, 같은 시간, 같은 교문. 나란히 걷는 게 어색해서 나는 자꾸 반보쯤 뒤로 떨어졌다가 다시 맞추기를 반복했다. 학교 근처에 다다르자 서연이가 갑자기 걸음을 늦추며 말했다. 저기, 학교에서는 그냥 반 친구처럼 하자. 굳이 얘기 안 해도 되잖아. 그녀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나는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알릴 필요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몇몇 아이들이 우리 둘이 같은 시간에 등교한 걸 눈치챈 듯했다. 특히 내 뒷자리에 앉는 정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야, 너 오늘 서연이랑 같이 왔냐. 나는 아니라고 대충 둘러댔지만, 정우의 시선은 쉽게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나 나와 서연이 쪽을 번갈아 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쉬는 시간, 서연이 주변에는 늘 그렇듯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웃음소리와 수다가 그쪽 자리에서 끊이지 않았다. 그중 한 명, 반에서 서연이와 제일 친한 지우가 나를 슬쩍 쳐다보며 웃었다. 그 웃음이 왠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책을 펼쳐놓고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과 후, 나는 혼자 복도를 걷다가 지우와 마주쳤다. 그녀가 나를 붙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준아, 너랑 서연이 무슨 일 있지. 나는 그 질문에 순간 표정이 굳었다. 손에 들고 있던 가방끈을 나도 모르게 꽉 쥐었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지우는 그런 내 반응을 놓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 웃음 끝에 매달린 다음 말이 무엇일지, 나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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