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누이가 된 첫사랑

4화

나는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서연이는 내 대답을 기다리며 문틀에 손을 얹은 채 서 있었다. 창밖에서는 이삿짐 트럭이 떠나는 소리가 아직 남아 있었다. 오늘 낮에 서연이와 서연이 어머니가 이 집으로 들어왔다. 상자를 옮기고, 가구 배치를 다시 하고, 낯선 냄새가 나는 그녀의 물건들이 우리 집 곳곳에 자리를 잡는 걸 하루 종일 지켜봤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빠와 서연이 어머니는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만, 나와 서연이는 서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밥만 먹었다. 그리고 지금, 그 낯선 하루의 끝에 이 순간이 놓여 있었다. 안 되지, 그건. 나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이제 가족이잖아. 그 말이 스스로도 어색하게 들렸다. 가족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힘주어 말한 적이 없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서연이는 같은 반에서 창가 자리에 앉은, 내가 몰래 훔쳐보던 아이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부터는 서류상으로, 그리고 이 지붕 아래에서, 누나도 여동생도 아닌 애매한 자리에 있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서연이는 잠시 말이 없다가 낮게 웅얼거렸다. 나도 알아, 가족인 거. 근데 잠은 진짜 무섭단 말이야. 어릴 때부터 그랬어.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더 심해졌고. 그 말에 나는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가 짊어진 무게를 나는 자세히 몰랐지만, 방금 그 한마디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밤에 대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날 어떤 소리를 들었고 어떤 어둠 속에 혼자 있었는지, 나는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나는 소파 쿠션을 안으며 말했다. 방문 열어놓고, 나는 계속 여기서 잘게. 무슨 소리 나면 바로 갈 수 있어. 그러니까 진짜 방 안에서 같이 자는 건, 좀. 나는 말끝을 흐렸다. 서연이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거로는 안 돼. 소리만 들려서는 잠이 안 와. 진짜 사람이 옆에 있어야 안심이 돼. 그녀의 목소리에 짜증이 살짝 섞였다. 오늘 하루 종일 낯선 집, 낯선 방, 낯선 모든 것들 속에서 그녀도 지쳐 있었을 것이다. 상자를 풀고, 옷장을 정리하고, 처음 보는 사람의 아들과 한 지붕 아래에서 첫날 밤을 맞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에게는 버거웠을 것이다. 나는 그걸 헤아리지 못하고 소파와 방 사이의 거리만 재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슬며시 올라왔다.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 서연이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냥 오빠 대하는 것처럼, 그런 느낌으로 편하게 있고 싶은 건데. 오빠라는 단어가 낯설게 귀에 걸렸다. 그녀가 나를 그렇게 부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학교에서는 이름을 부르고, 어제까지는 하준아였는데, 지금 이 순간 오빠라는 호칭이 튀어나왔다.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오빠. 그 단어가 주는 거리감과 동시에 밀착감이 이상하게 뒤섞였다. 어제까지 짝사랑하던 반 친구였는데, 오늘은 가족이 되었고, 지금은 오빠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세 가지 위치가 내 안에서 자꾸 부딪혔다. 짝사랑하던 애를 오빠라고 부르게 만들어야 하는, 그런 이상한 역할을 나는 받아들여야 했다. 나도 처음엔 이상했어. 서연이가 이번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우리 이제 진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편하게 생각하려고 하는 건데. 오빠는 그게 힘들어. 그 물음에 나는 대답 대신 시선을 떨어뜨렸다. 힘든 게 아니라, 나는 이 상황 자체가 너무 낯설고 조심스러웠다. 그녀가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게 오히려 다행이면서도 서글펐다. 어제까지 짝사랑했던 사람에게 오빠 소리를 듣는 게 힘드냐고 물으면,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하는 걸까. 힘들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힘들다고 하면 그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나는 둘 다 할 수 없었다. 결국 알겠어. 나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오늘만, 진짜 오늘만. 나 침대 가장자리에서 잘게. 이불도 따로 덮고. 그녀는 그 말에 안도한 듯 얼굴이 밝아졌다. 응, 그럼 돼. 고마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방 안에는 아직 다 풀지 못한 상자 두어 개가 벽에 붙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낡은 액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언뜻 본 사진 속에서 어린 서연이가 한 남자의 손을 잡고 웃고 있었다. 아마 돌아가신 아버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 불을 끄고 침대 양 끝에 각자 누웠다. 침대가 크지 않아서, 등을 돌리고 누워도 서로의 체온이 느껴질 만큼 가까웠다. 나는 벽 쪽으로 최대한 몸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창밖에서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소리가 들렸고, 어딘가 멀리서 개 짖는 소리도 들렸다. 새로운 집의 소음들은 낯설었고, 그 낯섦 속에서 그녀가 얼마나 잠을 이루기 힘들었을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서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준아, 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 자는 거 알아. 그녀가 작게 웃었다. 고마워. 진짜로.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등 뒤로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느려지는 걸 들었다. 처음엔 얕고 불규칙했던 숨소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길고 고르게 변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잠이 들었다. 나는 그 밤이 새도록 눈을 뜬 채로, 등 뒤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온기와 낮은 숨소리를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다 보면 이 이상한 상황이 조금은 견딜 만해질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몸을 뒤척였고, 나는 화들짝 놀라 숨을 참았다. 그녀는 다시 깊은 숨을 내쉬며 자세를 바꿨을 뿐이었다. 그렇게 밤은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나는 놀라서 몸이 뻣뻣해졌다. 어느 순간 서연이가 몸을 돌려 내 팔 가까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내 팔 위로 흩어져 있었고, 규칙적인 숨결이 팔뚝에 닿았다가 사라지곤 했다.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조심스럽게 몸을 빼내려 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그녀가 깰 것 같아 손끝 하나 움직이기 어려웠다. 어젯밤의 다짐이 무색하게, 나는 결국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었던 것이다. 이걸 누가 보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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