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저녁 여섯 시, 아버지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퇴근했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시계를 한 번 쳐다봤다. 여섯 시라니. 아버지는 늘 일곱 시 반, 어떤 날은 여덟 시가 넘어서야 들어오던 사람이었다.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별말 없이 식탁에 앉았다. 물어봐야 하나, 그냥 넘어가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아버지는 넥타이를 풀지도 않고 식탁 앞에 앉았다.
평소라면 집에 들어오는 순간 넥타이부터 풀었다. 넥타이 매듭에 손가락을 넣고 쭉 당기면서 아, 오늘도 죽겠다 소리를 내는 게 아버지의 습관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넥타이를 맨 채로 물컵만 만지작거렸다. 손끝이 컵 표면을 따라 미끄러지는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물을 마시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손가락으로 컵 겉면을 문지르는 동작을 반복했다. 물방울이 손가락을 따라 흘러내려 식탁 위에 작은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내가 묻자 아버지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큼, 큼. 그 헛기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하준아, 아빠가 할 말이 있다.
그 말투에서 이미 예감했다.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평소와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정색하고 부른 적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더라. 아마 엄마의 장례식 이후로는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물컵을 내려놓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뭔가 결심 같은 게 서려 있었다.
아빠 재혼한다. 다음 달에.
그 문장이 귀에 닿는 순간 나는 젓가락을 든 채로 굳어버렸다. 밥그릇 위에 걸쳐진 젓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재혼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들렸다. 마치 처음 배우는 외국어 같았다. 엄마가 떠난 지 삼 년, 그 사이 아버지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이야기는 몇 번 들었지만 결혼까지 갈 줄은 몰랐다.
돌이켜보면 짐작할 만한 순간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휴대폰 화면이 밝아질 때마다 슬쩍 웃는 표정, 주말마다 나가는 약속이 늘어난 것, 새로 산 셔츠들. 그런데도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아버지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엄마의 자리가 완전히 비어버리는 것 같아서였다.
좋은 분이야. 너도 좋아할 거다. 아버지가 덧붙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아버지가 혼자 지낸 시간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나도 모르지 않았으니까. 밤늦게 거실에서 혼자 술 마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몇 번이나 봤는지, 그 등이 얼마나 작아 보였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문제였다. 그분한테 딸이 하나 있어. 너랑 같은 나이래. 아마 같은 학교일지도 몰라.
같은 학교. 그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딩동.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집안을 울렸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씩 웃었다. 넥타이를 그제서야 느슨하게 풀면서, 마치 오늘 하루의 진짜 목적지가 지금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마침 잘됐네. 지금 오나 보다.
나는 심장이 이상하게 뛰는 걸 느끼며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젓가락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낯익은 향수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은은한 꽃향기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여자 두 사람이 들어섰다.
앞장선 여자는 정장을 단정하게 입은,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이었다. 박지현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웠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준 군. 그 존댓말이 어색하면서도 정중했다. 그런데 그녀의 뒤에서 나온 사람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긴 검은 머리, 투명한 파란 눈. 교복 재킷을 입은 채로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얼굴을 나는 매일 같은 교실에서 보고 있었다. 3열 두 번째 자리, 창가 쪽. 매일 아침 등교하면서 가장 먼저 눈으로 찾는 자리였다.
김서연이었다. 우리 반 최고의 미소녀. 반 아이들 절반이 몰래 좋아한다고 소문난, 나 역시 일 년 넘게 눈으로만 좇던 그 얼굴이 지금 우리 집 현관에 서 있었다. 신발을 벗으며 살짝 미간을 찡그리는 모습, 그 사소한 동작까지도 낯설게 익숙했다.
서연이도 나를 알아본 듯 눈이 커졌다. 어, 이하준.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목구멍이 바짝 말랐다. 학교에서였다면 백 번은 더 상상했을 상황이었다. 서연이와 마주쳐서 이름을 불리는 상황. 그런데 그게 우리 집 거실에서, 이런 방식으로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머, 둘이 아는 사이니. 박지현 씨가 반갑게 물었다. 같은 반이에요. 서연이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평소 교실에서 듣던 그 톤 그대로였다. 밝고, 조금은 장난스러운. 그 목소리를 우리 집 거실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아버지는 그것도 인연이라며 크게 웃었다. 잘됐다, 잘됐어. 둘이 친하게 지내면 되겠네.
친하게 지내면 된다는 말이 이상하게 무겁게 들렸다. 나는 서연이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여전히 놀란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그 표정 위로 서서히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신기하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이제부터 이 사람이 내 의붓누이가 된다는 사실만을 멍하게 되새기고 있었다.
박지현 씨가 짐을 정리하는 동안 서연이는 거실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되게 좋다, 집. 그녀가 소파에 앉으며 다리를 살짝 흔들었다. 발끝이 까딱거리는 리듬이 어딘지 경쾌했다. 여기 원래 두 명 살기엔 크겠다. 그녀가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흘끗 보더니 잠시 시선을 멈췄다. 나는 그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았다. 엄마와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이었다.
아버지와 박지현 씨는 부엌에서 뭔가 상의하는 듯했고, 나는 그 틈에 서연이와 단둘이 거실에 남게 되었다. 정적이 흘렀다.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서 텔레비전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으로 버튼을 누르지도 않으면서 그냥 매만지기만 했다.
저기, 하준아. 서연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 호칭이 낯설었다. 학교에서는 늘 이하준, 성까지 붙여서 불렀는데, 지금은 성을 뗀 채 이름만 불렀다. 그 작은 변화가 이상하게 크게 느껴졌다. 성 하나 떨어져 나간 것뿐인데, 그게 우리 사이의 거리를 통째로 바꿔놓은 것 같았다.
응. 나는 겨우 대답했다. 앞으로 잘 지내자. 그녀가 손을 내밀며 웃었다. 손톱이 짧게 정리되어 있었고, 손등에 작은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체육 시간에 다쳤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그 손을 잡으면서도 심장이 계속 이상한 속도로 뛰는 걸 느꼈다. 손바닥이 맞닿는 순간의 온도, 그 짧은 접촉이 오래 남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 오빠라고 불러야 하나. 서연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는 당황해서 아니, 그냥, 하준이라고 불러 라고 겨우 대답했다. 서연이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어, 하준아. 웃음소리가 거실 공기를 조금 가볍게 만들었다.
그날 밤, 부모님은 자정이 넘도록 결혼 준비를 이야기했고, 서연이는 먼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에서 인사를 나눌 때 그녀는 다시 봐, 학교에서 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인사가 유난히 오래 귀에 남았다.
나는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짝사랑하던 반 친구가, 다음 달부터 나의 가족이 된다니. 그것도 한 집에서 살게 된다니. 천장을 보며 몇 번이나 그 장면을 되새겼다. 서연이가 소파에 앉아 다리를 흔들던 모습, 그녀의 웃음소리, 손을 맞잡았던 그 짧은 순간.
이게 축복인지 재앙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절대 다가갈 수 없던 사람이 이제는 매일 같은 집에서 마주쳐야 하는 사람이 된다. 그 사실이 설렘과 불안을 동시에 안겼다.
그리고 그 순간, 아버지가 조심스레 방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하준아, 하나 더 얘기할 게 있는데. 아버지의 표정이 묘하게 조심스러웠다. 방금까지 웃고 있던 얼굴과는 다른, 뭔가를 망설이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 표정에서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오늘 하루에 이미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 아직도 남은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