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결월이 사라진 자리를 서지안은 며칠이나 지켜봤지만, 소용없었다.
처음 이틀은 그저 우연을 가장해 근처를 지나쳤다. 셋째 날엔 대놓고 눈을 맞추려 했다. 넷째 날에는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결월은 그 순간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그녀가 다가올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직접 부딪혀서는 안 되겠다.' 서지안은 결론을 내렸다. 정공법은 실패였다. 결월은 낯선 접근을 오히려 경계했고, 대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지안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근데 걔 왜 그렇게 놀라서 도망갔대?" 대지가 복도를 걸으며 물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 나 진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니, 네 잘못 아니야."
서지안은 짧게 답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대지는 그 뒤를 쫓아오며 뭔가 더 물으려 했지만, 서지안의 표정이 워낙 심각해서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 편이 나았다. 지금 필요한 건 대지의 사교성이 아니라 정보였다. 결월에 대해서, 그리고 이 세계가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더 알아야 했다.
***
그때 복도 모퉁이에서, 뭔가 화려한 것이 그녀와 정면으로 부딪혔다.
"아야!"
갈색 곱슬머리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것과 동시에, 귀에 걸린 피어싱 여러 개가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교복 셔츠 단추를 두 개나 풀어놓은 채, 화려한 인상의 여학생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안, 미안! 급하게 뛰어가느라—" 여학생이 손을 내밀며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시원시원한지, 방금 부딪힌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벌써 친한 척을 하는 것 같았다. "너 서지안이지? 1반? 나 오기라야."
서지안은 순간 머릿속에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느꼈다. 원작 2번 히로인, 오기라였다. 밝고 활발한 성격에, 교내 온갖 소문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 원작에서도 이 아이가 등장하는 장면마다 배경에 있는 애들이 죄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정보통이잖아.'
순간적으로 계산이 섰다. 이 인물이라면, 결월에 대한 뒷정보를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지금까지 물어볼 데가 없어 막막했던 게 이렇게 갑자기 해결될 수도 있는 거였다.
"오기라, 저기 혹시 시간 있어? 물어볼 거 있는데." 서지안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갔다.
오기라는 눈을 깜빡이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뭔데, 무슨 얘긴데." 방금까지 활기차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은밀한 속삭임으로 바뀌었다. 그 낙차가 너무 커서, 서지안은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물어본 건가 싶을 정도였다.
"차결월이라는 애 알아?"
그 순간 오기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웃던 입꼬리가 그대로 얼어붙었고, 눈동자만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주변을 두 번 살피고는, 서지안의 팔을 잡아끌어 빈 교실 쪽으로 밀어 넣었다.
"야, 너 그 이름 여기서 함부로 말하면 안 돼."
"왜?" 서지안이 눈을 크게 떴다.
"몰라서 물어? 걘 원래 있으나 없으나 한 애야. 근데 그런 애를 자꾸 건드리면..." 오기라는 말을 흐리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과장이라고 하기엔 눈빛이 너무 진지했다. 저 손짓 하나에 담긴 무게가 서지안이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뭐야, 무섭게."
"진짜야. 재작년에 어떤 선배가 그런 애 하나 챙겨주다가, 자기 인기 순위가 통째로 밀려서 결국 학교에서 존재감 자체가 지워진 적 있어."
"존재감이 지워졌다는 게 무슨 뜻인데?"
"말 그대로야. 어느 날 갑자기 걔 얘기를 아무도 안 해. 얘기를 하려고 해도, 이름이 입 밖으로 안 나와. 그러다 보면 정말로, 학교에 있었는지도 헷갈리게 돼." 오기라는 팔을 문지르며 몸을 떨었다. "나도 그 선배 얼굴 기억 안 나. 진짜 무서운 게 그 부분이야."
***
서지안은 그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도서실에서 봤던 '전학 예정자 목록', 사서의 이야기까지 겹쳐지자 확신이 굳어졌다. 이 세계의 규칙은 단순한 인기투표가 아니었다. 서사에서 밀려난 인물은, 진짜로 사라진다.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지금 네 위치, 절대 함부로 흔들지 마." 오기라가 정색하며 말했다. "괜히 그런 애한테 관심 뒀다가 너까지 휘말리면 어떡해. 너 지금 그럭저럭 존재감 있는 편이거든. 그거 아깝잖아."
"그거 다 어디서 들은 얘기야?"
"다들 알아. 말은 안 해도. 그니까 이 학교에서 결월이 얘기는 금기어라고 생각하면 돼." 오기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시계를 확인하더니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아, 나 진짜 늦었다. 다음에 또 얘기하자, 지안아!"
그러고는 다시 아까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방금 나눈 대화가 무색할 만큼 가벼운 뒷모습이었다.
서지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되물었다. '휘말려도 상관없어.' 그 결심은 이미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어 있었다.
하지만 오기라의 경고 이후로도,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응은 다들 비슷했다. 아주 조심스러운 화제라는 듯, 결월의 이름만 나오면 다들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심지어 담임에게 지나가듯 결월의 이름을 언급했을 때조차, 담임은 잠깐 멈칫하더니 "그, 그 애 얘긴 다음에 하자"며 서둘러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마치 그 이름 자체가 입에 대면 안 되는 무언가처럼.
'그래, 혼자 하면 되지.'
서지안은 그날 밤, 노트를 펼쳐 원작에서 기억나는 장면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인기 순위가 어떻게 오르내리는지, 어떤 사건이 누구의 비중을 키워주는지, 자신이 가진 예지의 조각들을 모조리 꺼내 정리했다.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노트에는 물음표만 늘어갔다.
'결월은 왜 존재감이 없는 걸까. 원작에서도 그런 설정이었나. 아니면 이 세계에서 새로 생긴 규칙인가.'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 사이에서, 서지안은 결국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 학교 건물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떠 있었다. 저 어딘가에 결월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리고 그 밤, 아주 멀리 떨어진 다른 교실에서, 결월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낮의 일을 떠올렸다.
낯선 여학생 하나가, 요즘 자꾸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우연이라 여겼는데, 이제는 확실히 무언가 의도가 있는 시선이었다. 다가오려다 멈추고, 다시 다가오려다 또 멈추는 그 어색한 움직임이 오히려 눈에 밟혔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렇게 집요하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결월은 손끝으로 책장을 넘기며, 아주 오랜만에 옅은 흥미를 느꼈다.
'저 애, 뭘까.'
책장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