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최애야, 주인공 시켜줄게

1화

눈을 뜬 순간, 천장의 무늬가 낯설었다. 분명 어제 잠들 때는 자취방의 우중충한 형광등이었는데, 지금 눈앞에는 몰딩까지 화려한 크림색 천장이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침대는 또 왜 이렇게 넓은지. 팔다리를 뻗어도 끝이 닿지 않았다. '이게 뭐야.' 서지안, 아니 지금은 서지안이라 불려야 하는 몸의 주인은 눈을 세 번쯤 깜빡였다. 눈을 감았다 뜨면 원래의 천장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세 번째로 눈을 떴을 때도 크림색 몰딩은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 보았다. 코가 오뚝했다. 원래 자기 코는 이렇게 오뚝하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 닿는 피부도 지나치게 매끈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방 안에 놓인 전신거울로 달려갔다. 달려가다가 이불 자락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거울 속에는 은색에 가까운 밝은 갈색 머리카락과, 웹소설 표지에서나 볼 법한 이목구비를 가진 소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지겹도록 봐서 외울 정도로 익숙한 얼굴이었다. '서지안이잖아.' 지난 3년간 밤마다 붙잡고 읽었던 웹소설 '화원에는 꽃이 있다'의 최고 인기 히로인, 그 서지안이었다. 심장이 아프도록 빨리 뛰었다. 그녀는 방을 세 바퀴 정도 빙글빙글 돌다가 벽에 머리를 박았다. 아프긴 했다.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꿈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이마를 짚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설명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으로 다가왔다. *** 책상 위에 놓인 입학식 안내장과 명찰을 보고 확신은 완전해졌다. 학교 이름도, 반 배정도, 원작 1화에 나왔던 그대로였다. 명찰에 새겨진 이름마저 '서지안'이었다. 혹시 몰라 서랍을 뒤져 보니, 소설 속에서 서지안이 즐겨 쓰던 것으로 묘사된 연보라색 필통까지 나왔다. '그러면 오늘이 그날이잖아.' 입학식 날. 원작에서 서지안이 처음으로 등장해 복도를 걷는 것만으로 남녀 학생들의 시선을 다 쓸어가던 그 장면. 그녀는 옷장에서 교복을 꺼내 입으며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느꼈다. 단추를 두 번이나 잘못 끼워서 다시 풀어야 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이건, 순수한 흥분이었다. 왜냐하면 오늘, 그 결월을 실제로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차결월. 원작에서 가장 인기 없던 히로인. 대사 분량도 적고, 후반부로 가면 존재감이 아예 사라지다시피 하는 캐릭터였지만, 서지안에게는 달랐다. 원래 세계에서 힘든 시기를 버티게 해준 유일한 위안이었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새벽, 침대에 누워 결월이 나오는 장면만 골라 다시 읽던 밤이 몇 번이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그런 존재를 실제로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신발끈을 두 번이나 잘못 매고서야 겨우 현관을 나섰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정돈하다가 문득 손을 멈추고, '이게 진짜 내 얼굴이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오래 머물 시간이 없었다. *** 강당은 시끌벅적했다. 신입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는 사이로, 서지안은 조용히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옆자리 아이가 흘깃 쳐다보고는 뭔가 말을 걸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그녀는 그쪽으로 눈길을 줄 여유조차 없었다. 그리고 뒤쪽 구석,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자리에 혼자 앉은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숨이 턱 막혔다. 검은 생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조용한 얼굴이었다. 손에는 얇은 문고판 책을 들고 있었는데, 강당 안 소음 따위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책에 고정한 채였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의 움직임까지도 어딘가 정갈했다. '차결월이다.' 원작에서 수백 번은 넘게 상상했던 얼굴이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감각이었다. 종이 위의 글자로 존재하던 사람이, 지금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이며 저기 앉아 있었다. 책장이 팔락이는 소리마저 실재하는 소리였다. 서지안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반쯔 일어났다가, 주변의 시선을 느끼고 도로 앉았다. 그야말로 팬심이 이성을 앞지르는 순간이었다. 심장이 어찌나 크게 뛰는지, 옆자리 아이가 이상하다는 듯 다시 한번 쳐다봤을 정도였다. 결월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저마다 짝을 찾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치 그녀 주변에만 투명한 유리벽이 세워진 것 같았다. 원작 그대로였다. '있으나 없는 아이.' 소설 속에서 결월을 설명하던 문장이 서지안의 머릿속에 그대로 떠올랐다.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는데, 지금 눈앞에서 그 문장이 현실로 재현되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더 아렸다. 그런데. 그 순간, 결월이 문득 시선을 들어 강당 안을 훑었다. 책을 읽던 시선이 아니라,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이 잠깐, 정확히 서지안 쪽에서 멈췄다. 서지안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결월과 시선이 마주친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이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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