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전학 예정자 목록에 결월의 이름이 있었다. 서지안은 종이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꼈다.
'무슨 소리야.'
원작에서 결월이 전학을 갔던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그런 전개는 없었다. 서지안은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종이를 다시 확인했다. 날짜는 2학기 초, 담당 교사 서명란에는 이미 도장이 찍혀 있었다. 손끝으로 종이를 만져 보니 인쇄 잉크의 서늘한 감촉까지 그대로였다. 위조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진짜 같았다.
행정실 게시판 옆에서 우연히 마주친 학생 하나를 붙잡고 물어봤다.
"저기, 이거 왜 붙어 있는 거예요?"
"어, 그거? 매년 나오는 예비 명단이에요. 성적이나 출결 이상한 애들 관리 대상으로 걸어놓는 거라던데."
학생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지나갔다. 서지안은 그 뒷모습을 잠시 노려보았다. 저렇게 태평할 수 있다니, 세상 편하게 사는 것도 재주였다.
'성적이나 출결 이상.'
결월이 그런 이유로 걸릴 리는 없었다. 원작 속 결월은 성적이 나쁜 것도, 지각을 자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을 뿐이다. 서지안은 다시 명단을 훑어보았다. 이름, 학년, 반. 그리고 그 옆에 붙은 짧은 이유란.
'무존재감.'
행정 용어치고는 지독하게 이상한 단어였다. 서지안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누가 지나가다 부딪혀도 모를 만큼, 발이 바닥에 붙어버린 것 같았다.
***
도서실에서 정보를 더 캐보려던 서지안은 사서 선생님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학생이요? 아, 걘 보통 조용해서 다들 잘 몰라요."
사서는 대출 카드를 정리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다 뭔가 떠올랐다는 듯 손을 멈췄다.
"근데 재밌는 게, 작년에도 비슷한 애가 하나 있었거든요."
"비슷한 애요?"
서지안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커졌다. 사서는 그 반응이 신기하다는 듯 잠깐 그녀를 쳐다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 있는지 없는지 티도 안 나는 애였는데, 학기 중간에 갑자기 전출 처리됐어요. 서류상 이유는 늘 똑같아요. '주요 서사에서 배제됨.'"
'주요 서사에서 배제됨.'
서지안은 순간 숨을 삼켰다. 이건 단순한 학교 행정이 아니었다. 이 세계 자체가, 마치 원작 소설의 편집 원칙을 따르는 것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편집자가 필요 없는 문단을 통째로 지우듯, 이 세계는 필요 없는 사람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것이다.
"저, 그 애는 그 후에 어떻게 됐어요?"
"글쎄요. 그냥 어느 날부터 안 보이더라고요. 전학 갔다는 소문만 돌았지, 아무도 정확히는 몰라요."
사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투로 대답하고는 다시 카드 정리로 돌아갔다. 서지안은 그 무심함이 오히려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통째로 한 사람을 지워버려도, 아무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까.
비중이 없는 인물은, 정말로 지워진다.
'그럼 결월이도.'
원작에서 결월의 존재감이 옅어지다가 조용히 사라졌던 걸, 서지안은 그저 작가의 게으른 필력 탓이라 생각했었다. 분량 조절에 실패한 작가가 조연 하나를 슬쩍 퇴장시킨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는 그것이 말 그대로 존재의 삭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서지안은 도서실 창문에 이마를 잠깐 대고 눈을 감았다. 유리가 차가워서 정신이 오히려 또렷해졌다.
***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서지안의 목표는 훨씬 더 무거워졌다.
단순히 결월을 대지와 이어주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결월이 서사 안에 붙어 있을 근거, 존재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근거는 대체로 서지안 자신의 인기와 입지를 나눠줘야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가진 걸 나눠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원작에서 서지안이라는 캐릭터는 인기 순위 1위였다. 반 아이들의 시선도, 선생들의 호감도, 심지어 지나가는 엑스트라들의 대사 한 줄까지도 전부 그녀 쪽으로 쏠려 있었다. 그 자리는 어쩌면 이 세계에서 자신이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했다. 인기가 곧 서사의 지분이고, 서사의 지분이 곧 생존이라면, 그걸 나눠준다는 건 스스로 목줄을 늘려주는 것과 같았다.
'근데 그렇다고 결월이를 그냥 지워지게 둬?'
그 생각을 하자 속이 뒤틀렸다. 몇 년을 그리워한 이름이었다. 원작을 읽으며 몇 번이나 그 짧은 등장 분량을 아쉬워했던 인물이었다. 이제 와서 자신의 안전을 이유로 손을 놓는다면, 서지안은 스스로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생각을 오래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결월의 얼굴이, 여전히 아무 일도 모른다는 듯 평온했기 때문이었다. 창가 자리 쪽에서 걸어오는 걸음도, 손에 든 책의 각도도, 전부 태연했다. 자신이 곧 세상에서 지워질 예비 명단에 올라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저, 실례지만." 서지안이 먼저 말을 걸었다. 목소리가 떨리는 걸 애써 감췄다.
결월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네?"
짧고 조심스러운 대답이었다. 서지안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몇 년을 그리워하던 목소리를, 지금 처음으로 실제로 듣고 있었다. 상상 속에서 수백 번은 재생했던 목소리인데, 실제로 들으니 상상보다 훨씬 낮고 담담했다.
"아, 아니에요. 책 좋아하시나 봐요."
어색한 문장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뭘 물어본 건지 알 수 없는 질문이었지만, 결월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용한 걸 좋아해서요."
그 말이 서지안의 귀에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조용한 걸 좋아한다니, 하필이면 그런 성향 때문에 서사에서도 조용히 지워지는 신세가 됐다는 게 우스울 정도로 얄궂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서지안은 그날 밤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네, 조용한 걸 좋아해서요'를 몇 번이나 입 밖으로 중얼거려 봤다. 그리고 그 밤, 또 하나의 장면이 예지처럼 떠올랐다.
도서실 구석, 아무도 앉지 않는 자리에서 결월과 대지가 처음으로 마주치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이 왜 이렇게 선명하게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이미 벌어진 일을 떠올리는 것처럼, 조명의 색깔과 창밖의 날씨, 대지가 문을 여는 소리까지도 생생했다.
'설마 이것도, 지워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장면인가.'
서지안은 그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세계가 결월을 지우기로 결정했다면, 그 장면은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