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닭 잡던 손에 검이 깃들다

5화

박강호가 팔을 풀며 다가왔다. 관절 꺾이는 소리가 뚝뚝 울렸다. 체격이 이도현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어깨도 두 배는 넓어 보였다. 네가 그 소문의 신입이냐. 박강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소문이 뭔데요. 이도현이 되물었다. 하루 만에 도살장을 쓸었다고. 박강호가 팔짱을 꼈다. 강태오가 옆에서 씨익 웃었다. 이 형님이 학도 4급이야. 너 학도 몇 급이냐. 이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상태창을 슬쩍 확인했다. 학도 5급이라니까 저놈들이 뭐라고 할지 궁금하네. 웃으면서 알려줄까, 아니면 그냥 눕히고 말할까. 말 안 해도 알겠다. 어차피 잡역이니 낮겠지. 강태오가 비웃음을 던졌다. 한판 붙자. 박강호가 정식으로 도전장을 던졌다. 규칙은 뭔데요. 이도현이 물었다. 간단해. 먼저 상대를 바닥에 눕히면 이기는 거다. 무기는 없고. 박강호가 자세를 잡았다. 이도현은 도살장 바닥을 둘러봤다. 좁은 통로, 발을 잘못 디디면 우리에 부딪힌다. 바닥엔 핏물이 굳어 미끌거렸다. 저 우리 안에서 뭔가가 낮게 울었다. 조건이 좀 불리한데. 이도현이 중얼거렸다. 뭐라는 거야. 박강호가 인상을 찡그렸다. 됐고, 시작하죠. 이도현이 자세를 잡았다. 강태오가 뒤로 물러서며 팔짱을 꼈다. 박강호 형님 손 좀 봐줘요. 잡역 애들 요즘 기어오르는 게 심하네. 박강호가 먼저 달려들었다. 주먹이 날카롭게 뻗어왔다. 이도현은 몸을 틀어 피했다.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생각보다 느리네. 닭보다 못하잖아. 박강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새끼가. 박강호가 다시 발을 들어 이도현의 다리를 걸려 했다. 이도현은 그 발을 짧게 밟았다. 박강호의 균형이 흔들렸다. 이도현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팔을 뻗었다. 박강호의 어깨를 잡아 그대로 당겼다. 쿠당탕. 박강호가 바닥에 넘어졌다. 핏물 웅덩이에 얼굴이 처박혔다. 뭐, 뭐야. 박강호가 얼떨결에 바닥에서 이도현을 올려다봤다. 강태오의 얼굴이 새하얗게 굳었다. 팔짱 낀 손이 스르르 풀렸다. 말도 안 돼. 학도 4급이 학도 1급한테. 강태오가 더듬거렸다. 1급 아니고 5급인데요. 이도현이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 뭐? 오늘 도살장 좀 쓸었거든요. 이도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강태오가 입을 뻐끔거리다 다물었다. 뭐라고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얼굴이었다. 박강호가 이를 갈며 일어섰다. 입가에 핏물이 묻어 있었다. 다시. 이번엔 진짜로 간다. 박강호가 자세를 낮췄다. 손끝에서 미세한 기운이 일었다. 공기가 부르르 떨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무공을 쓰려나. 이도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박강호가 발을 박찼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주먹에 붉은 기운이 서렸다. 이도현은 몸을 낮췄다. 닭을 상대하며 익힌 감각이 살아났다. 수백 번 쪼이고 채이며 배운 감각이었다. 주먹이 머리 위를 스쳤다. 바람 갈라지는 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이도현은 그 팔 아래로 파고들며 무릎으로 배를 올렸다. 퍽. 박강호가 숨을 몰아쉬며 뒤로 튕겨났다. 등이 우리 창살에 부딪혔다. 철컹. [숨겨진 조건 충족: 격투 승리.] [보너스 경험치 500 획득.] 박강호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지 못했다. 가슴을 움켜쥐고 헐떡였다. 강태오가 뒷걸음질쳤다. 등이 벽에 닿을 때까지 물러났다. 이, 이게 어떻게. 그때 통로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최정성이었다. 뭐 하는 짓들이냐. 최정성이 세 사람을 훑어봤다. 박강호가 쓰러진 걸 보더니 눈이 커졌다. 네가 저놈을 이겼다고? 최정성이 이도현을 향해 물었다. 이도현이 옷을 털며 일어섰다. 핏물 튄 옷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닭 잡다 보니 실력이 좀 붙어서요. 최정성의 얼굴에 처음으로 놀라움이 스쳤다. 눈썹이 꿈틀거렸다. 닭 잡다 붙은 실력으로 학도 4급을 눕혔다고. 최정성이 낮게 되뇌었다. 그가 이도현에게 다가와 물끄러미 그를 살폈다.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꽤 오래 머물렀다. 너, 시스템 받은 거 맞지. 최정성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이도현은 순간 멈칫했다. 어떻게 알았지. 표정 관리는 됐나 모르겠네. 숨길 이유는 없다. 이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급 현사 시스템이던데요. 좀 별로던데. 이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최정성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갔다. 초급이 아니라 초월급이야. 뭔 소리예요, 같은 말이잖아요. 이도현이 되물었다. 최정성이 품에서 낡은 목간을 꺼냈다. 먼지 쌓인 표면에 옛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손끝으로 스치자 먼지가 바스라졌다. 한자로 쓰면 이거다. 초월할 초, 등급 급. 네가 받은 이름은 최하급이 아니라 초월급이란 뜻이야. 이도현의 눈이 커졌다. 초월급. 들어본 적 없는 등급이었다. 아니, 애초에 등급이란 개념 자체가 있는지도 몰랐다. 최정성이 목간을 이도현에게 내밀었다. 이건 원래 이 도살장을 관리하던 전대 관리자의 유품이다. 네 시스템을 보니 줘야 할 것 같군. 이도현이 목간을 받았다. 표면이 서늘했다. 쥐고 있는데도 손끝이 시렸다. [미확인 유물 감지.] [봉인 해제 조건: 미충족.] 봉인이라니. 이도현이 목간을 뒤집어 봤다. 아무리 돌려봐도 문자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거 조건은 뭔데요. 이도현이 최정성을 향해 물었다. 최정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최정성의 표정이 굳었다. 먼 곳에서 종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낮고 불길한 소리였다. 댕, 댕, 댕. 뭐야 저건. 강태오가 몸을 떨었다. 아까보다 얼굴이 더 하얬다. 최정성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장로원 소집이다. 너희 셀 다 잡히는 게 아니었으면. 최정성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긴장이 실렸다. 평소 냉정하던 얼굴에 균열이 갔다. 이도현은 목간을 움켜쥔 채 통로 밖을 바라봤다. 하늘의 균열이 더 커져 있었다. 붉은 빛이 전보다 짙었다. 마치 하늘 자체가 상처처럼 벌어진 것 같았다. 뭔가 심상치 않다. 이건 그냥 시작일 뿐이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