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몰락 귀족의 마법서

1화

내 이름은 강태준이고, 올해로 열여덟이다. 하급 귀족가문의 막내라고 하면 사람들은 으레 풍족한 삶을 떠올리지만, 실상은 그와 정반대였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가 전사한 뒤로 우리 집안의 작위란 것이 명예 말고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작이라는 호칭은 관공서 서류에나 남아 있을 뿐, 정작 그 호칭 덕분에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으니, 요컨대 이름만 귀족이고 실상은 평민보다 못한 살림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아버지는 해동제국 최강의 장군이라 불리는 백강호 님의 부관이었고, 나는 어릴 때부터 그 이름을 신처럼 떠받들며 자랐는데, 요컨대 내 인생의 첫 번째 목표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강자가 되는 것, 그것뿐이었다. 문제는 내 몸이 그 목표를 조롱하듯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고, 조금만 무리해도 열이 오르고 숨이 가빠져서, 어머니 윤미경께서는 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을 거라는 소리를 의사에게서 몇 번이나 들었다고 하셨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보면, 겨울마다 한 번씩은 꼭 사경을 헤맸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하던 손을 놓고 내 이불 옆에 앉아 밤새 물수건을 갈아주셨는데, 그 손끝이 바늘에 찔려 갈라진 자국들을 보면서도 나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남았는데, 그것이 순전히 의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인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하루하루를 버셨고, 나보다 세 살 많은 누나 강수아는 과일가게에서 낮에 일하고 밤에는 주점에서 접시를 날랐는데, 나 역시 그 짐을 나눠지고 싶어서 밤마다 물류창고에서 짐을 옮기는 일을 했다. 몸이 약한 놈이 무슨 짐꾼이냐고 물으면 나는 항상 이렇게 답했다. 안 하면 굶으니까. 그것 말고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물류창고 반장님은 나를 볼 때마다 혀를 차면서도 다른 일보다 가벼운 상자들만 골라서 맡겨주셨는데, 그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자존심이 상해서, 나는 일부러 더 무거운 상자를 들어보이며 괜찮다고 우겼다가 다음날 열이 40도까지 오른 적도 있었다. 그러고도 이틀을 앓고 나서야 겨우 다시 일을 나갈 수 있었으니, 몸이 이렇다는 걸 인정하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대부분 황립 상급 마법학원 입학을 위한 준비금으로 쌓아두었는데, 그 학원에 들어가야만 마력을 제대로 배워 몸을 개조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처럼, 백강호 장군처럼, 강해지고 싶었으니까. 그 마음 하나로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중등 마법학원 수업을 들으며 이를 갈았는데, 몸이 이렇게 부실한 채로 강해질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밤에 창고 일을 마치고 새벽 별을 보며 집으로 걸어갈 때마다, 나는 늘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그 언젠가가 구체적으로 언제인지는 나도 몰랐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날은 중등 마법학원에서 일 년에 한 번 진행하는 정기 마력 감별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교실 전체가 묘하게 들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 감별 결과가 곧 상급 학원 진학 여부를 좌우하기 때문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동급생 몇몇은 벌써부터 자기 마력 그릇이 얼마나 클지 떠들어댔고, 나는 그 대화에 끼어들 자격조차 없다는 걸 알기에 그저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손석준 선생님께서 직접 감별 의식을 진행하셨는데,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눈빛이 매서운 그 노교사는 나를 유독 아껴주셨으니, 그 이유는 아마 내가 수업 시간마다 유일하게 눈을 반짝이며 마법 이론을 파고드는 학생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언젠가 선생님은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태준아, 몸이 그릇을 못 받쳐주는 건 안타깝지만, 그 열정만큼은 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최고다." 그 말이 위로였는지 놀림이었는지는 지금도 헷갈렸다. "태준아, 이리 와서 손을 얹어보아라" 하고 선생님이 말씀하셨고, 나는 별 기대 없이 감별용 수정구에 손을 올렸다. 이전 몇 년간 감별 결과는 늘 똑같았다. 마력 그릇 크기 미미, 성장 가능성 낮음, 이라는 판정. 그 결과지를 받아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는데, 어차피 내 몸이 병약한 이상 마력이 있어봤자 쓸 수도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앞서 감별을 마친 다른 학생들은 저마다 수정구가 옅게 빛나는 걸 보며 환호하거나 실망했는데, 내 차례가 되자 다들 별 관심 없다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매년 똑같은 결과가 나올 거라는 걸 반 전체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수정구에 손을 얹은 순간, 손끝에서부터 뭔가 뜨거운 것이 역류하는 감각이 느껴졌고,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떼려 했지만 이미 수정구가 내 손을 붙잡은 것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손바닥이 그대로 수정구에 녹아 붙은 듯한 느낌이었고, 그 뜨거움은 곧 팔을 타고 어깨까지 치솟아 올랐는데, 손석준 선생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표정을 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교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몇몇 학생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경고: 감별 대상의 마력 그릇 용적이 신체 허용 기준치를 초과합니다.] 생전 처음 보는 문구가 시야 한가운데 떠올랐는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린지 몰라서 나는 눈을 몇 번이나 깜박였다. 선생님께서는 아무 반응이 없으신 걸 보니 이 문구는 오로지 나에게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주변 학생들 눈에는 그저 내가 수정구를 붙잡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는 모습만 보였을 텐데, 그 시선들이 하나둘 나를 향해 모이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뭐야 이게" 하는 말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특이사항 확인: 자아 각성형 마력 그릇 — 명칭 '폭식하는 그릇'.] [안내: 그릇을 강제로 개방하면 마력이 급속히 성장하나, 신체 내구도가 함께 소모됩니다.] [잔여 내구도: 100%] 그 순간 나는 이 모든 것을 이해했다. 내가 평생 병약했던 이유, 조금만 무리하면 열이 오르고 숨이 가빴던 이유, 어머니가 몇 번이나 의사에게서 사망 선고 비슷한 말을 들어야 했던 이유, 그 모든 것이 바로 이 몸속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마력 그릇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요컨대 나는 병든 몸이 아니라, 그릇에 짓눌린 몸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열여덟 해가 통째로 재해석되는 기분이었는데, 그 재해석이 딱히 반갑지는 않았다. 억울함이 먼저 치솟았다. 진작 알았다면 뭔가 달랐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곧 부질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태준아, 손을 떼거라, 지금 당장" 하고 선생님이 다급하게 소리치셨지만, 나는 이미 그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수정구에서 손을 떼려 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대신 시야를 가득 채운 문구들만이 계속 쏟아졌다. 마치 오랫동안 잠겨 있던 수문이 한꺼번에 열린 것처럼, 정보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와 머릿속을 헤집었는데,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다 읽어낼 수조차 없었다. [경고: 내구도가 0%에 도달하면 심장 기능이 정지합니다.] ...개사긴데. 나는 그 문구를 보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십팔 년을 병약하게 살아온 것도 억울한데, 이제는 강해질 수 있는 열쇠가 나타났다고 해서 좋아할 틈도 없이, 그 열쇠를 쓰는 순간 심장이 멈춘다는 경고까지 함께 받아버린 셈이었으니까. 이런 걸 두고 하늘이 준 재능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하늘이 친 사기라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십팔 년을 버텨왔는데, 그 보상이 심장 정지 카운트다운이라니, 이건 누가 봐도 형편없는 거래였다. 손석준 선생님이 내 팔을 억지로 잡아당겨 수정구에서 떼어내자,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숨은 턱까지 차올랐는데, 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웠다. 교실 안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지만, 그 소리마저도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했다. 그 와중에도 시야 한 귀퉁이에는 여전히 작은 문구 하나가 남아 깜박이고 있었다. [잔여 내구도: 97%] 방금 그 짧은 순간에 벌써 3퍼센트가 깎였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숫자를 보며 아주 단순한 계산을 해보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쓰다가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계산이었는데, 100을 3으로 나누면 대략 서른 번 남짓, 서른 번 정도 이 그릇을 열었다가는 그대로 심장이 멈춘다는 뜻이 아닐까. 그런데 방금 건 감별 의식에서 손만 얹었을 뿐인데 이 정도가 깎였다면, 실제로 마법을 써서 전투에 나선다면 대체 얼마가 깎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답이 나오기도 전에 손석준 선생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걸 보고서야 이게 결코 웃을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선생님, 저 지금 이거 뭔지 아세요" 하고 물었지만, 선생님은 대답 대신 나를 조용한 교무실로 끌고 가셨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선생님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는데, 예순 평생 온갖 학생들의 마력을 감별해온 노교사가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 떨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교무실 문이 닫히고, 선생님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책상 위에 어지럽게 쌓인 서류들을 비추고 있었는데, 그 정적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선생님이 무겁게 입을 열었을 때, 나는 그 첫마디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닐 거라는 걸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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