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 이후 며칠은 정신없이 흘렀다.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고, 예전에 거절당했던 배역 제안서까지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휴대폰은 하루 종일 진동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부재중 전화가 열 통 넘게 쌓여 있었고, 메일함은 확인하지 않은 것만 수십 개였다. 예전에는 이런 관심이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덤덤했다. 어쩌면 그동안 숨겨왔던 것들이 밖으로 나오면서, 나 자신도 조금 가벼워진 건지도 몰랐다.
윤서아는 매일같이 내 스케줄을 정리하며 옆을 지켰다. 그녀는 처음의 어리숙함과 다르게, 하루가 다르게 능숙해지고 있었다. 스케줄표를 손에 들고 다니던 모습에서, 이제는 태블릿 하나로 모든 걸 확인하며 척척 답을 내놓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인터뷰 요청은 이렇게 세 개로 줄였고요, 이 배역 제안서는 조건이 별로라서 제가 미리 거절해뒀어요. 그녀가 조율한 스케줄표를 보면 군더더기가 없었다.
저 이제 회사 사람들이 저한테 강도현 담당이라고 불러줘요. 그녀가 자랑스럽게 말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웃음이 났다. 예전에는 웃음을 참는 게 습관이었는데, 요즘은 웃음이 새는 걸 참는 게 더 어려웠다. 회의 중에도, 그녀가 커피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오는 사소한 순간에도,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볼 때마다 왜 웃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같이 웃었다.
한소은과도 몇 번 더 연락이 오갔다. 처음엔 방송에 대한 사후 확인 차원이었는데, 대화는 점점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물었다. 정말 골목의 고양이들 이름도 다 알아요? 방송에서 우신 거, 후회하세요? 나는 매번 솔직하게 답했다. 후회는 안 해요. 오히려 후련했어요. 그녀는 그 말에 짧게 웃고는, 다음에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통화가 끊긴 뒤에도 나는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무게가 있었다. 가볍게 던지는 말 같으면서도, 그 안에 뭔가 진심 같은 게 섞여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좋은 흐름만 있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 회의실에서 대표님과 이사진이 나눈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나는 지나가다 걸음을 멈췄다. 원래는 회의실 앞을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발이 저절로 멈춰버렸다.
이번 이미지 잘 써먹어야 해. 너무 다정한 이미지로만 가면 또 질리니까, 적절히 냉정함도 섞어서 콘셉트를 짜야 돼. 인터뷰 질문지도 우리가 미리 손봐서 넘기고, SNS 계정도 하나 새로 만들어서 우리가 관리하는 걸로. 목소리는 익숙했다. 몇 번 인사를 나눈 이사였다. 그 옆에서 대표님이 낮게 웃는 소리도 들렸다. 반응이 좋으니까 계속 밀어붙여야지.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스토리 하나 잘 만들면 몇 년은 먹고 들어가.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내가 흘린 눈물, 내가 숨겨왔던 다정함, 그것들이 어느새 회사의 콘텐츠가 되어 있었다. 골목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던 것도, 오래된 이웃 할머니의 안부를 챙기던 것도, 전부 누군가에게는 그저 팔기 좋은 소재였다.
나는 회의실 문을 밀고 들어가려다 멈췄다. 화를 낼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결국 그 눈물도 방송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거고, 회사는 그걸 상품으로 다루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데도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게 치밀어 올랐다. 목구멍이 뻑뻑해지고,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때까지 손을 꽉 쥐었다. 나는 결국 문을 열지 않고 돌아섰다.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날 저녁, 윤서아가 내 표정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으세요. 나는 잠시 대답을 미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그러다 결국 회의실에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말을 하는 동안에도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강도현 씨 진짜 모습을, 그렇게 마음대로 편집하려는 건. 나는 그녀의 말에 조금 놀랐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단단해진 눈빛이었다. 예전 같으면 저도 어려서요, 하고 웃으며 넘겼을 그녀가, 이제는 정면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저 이제 강도현 씨 매니저잖아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면 제가 막을게요. 그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하면서도 손끝은 살짝 떨렸다. 확신과 두려움이 동시에 담긴 목소리였다. 나는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십 년 넘게 혼자 버텨온 자리에, 처음으로 누군가 함께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낯설고, 동시에 뭉클했다.
다음 날, 회사에서 정식으로 SNS 계정 개설 건에 대한 협의 요청이 들어왔다.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계정 운영을 대행사에 맡기고, 게시물 톤을 미리 정해두자는 내용이었다. 제안서에는 세세한 항목들이 적혀 있었다. 주 3회 게시, 댓글 응대는 대행사가 대신, 사진은 사전 승인 후 업로드. 나는 그 제안서를 받아 들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진짜 나를 세상에 보여준 게 방송이었는데, 이제는 그 진짜조차 누군가의 손끝에서 다시 편집될 판이었다.
윤서아는 내가 제안서를 내려놓는 걸 보더니, 조용히 다가와 옆에 앉았다. 이거, 제가 한번 읽어봐도 될까요? 나는 별말 없이 제안서를 건넸다. 그녀는 한 장 한 장 넘기며 미간을 좁혔다. 이건 좀 심한데요. 사진까지 사전 승인을 받으라니. 강도현 씨가 무슨 인형도 아니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짜 화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실장님이 조심스레 다른 소식을 전했다. 강원도 온천 리조트 촬영 건이 하나 들어왔는데, 새로운 이미지에 맞는 로맨스 드라마 파일럿이라고 했다. 겨울 배경에, 온천 마을에서 재회하는 커플 이야기라고 했다. 여주인공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사람이 한소은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며칠 전 통화에서 그녀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다음에 시간 되시면, 그날 이야기 좀 더 듣고 싶어요.
일이 다시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낯선 손길이 계속 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제안서를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예전 같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배역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배역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해지고 있었다.
동시에, 회의실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콘셉트를 짜야 돼. 그 말이, 앞으로 다가올 무언가의 전조처럼 느껴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노을이 점점 짙어지면서, 나는 이 모든 흐름이 결국 어디로 나를 끌고 갈지 알 수 없다는 불안을 떨쳐내지 못했다. 실장님이 건넨 파일럿 대본이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표지에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촬영 일정이 적혀 있었고, 그 밑에 작게 적힌 촬영지 이름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강원도, 온천 리조트. 나는 그 글자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