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생방송 전날 밤, 나는 대본을 열 번도 넘게 읽었다. 문장 하나하나를 소리 내어 읽어보고, 어미까지 다듬었다. 냉정하게, 흔들리지 말고, 필요한 말만. 실장님은 전화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미지 회복이 아니라 이미지 방어가 목적이니까 절대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마세요. 알겠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지만 정작 손끝은 계속 차가웠다. 대본 종이를 쥔 손가락 끝이 얼음장 같았다. 몇 번이나 손을 비볐는지 모른다.
거울 앞에 서서 표정을 연습했다. 무표정. 그냥 무표정이면 된다. 웃지도 말고 찡그리지도 말고, 딱 그 선에서만 머물러야 한다. 그런데 거울 속의 내 얼굴은 자꾸 낯설게 느껴졌다. 이게 십 년 넘게 훈련해온 얼굴인데, 왜 오늘따라 남의 것 같을까.
원래 그 자리에 나가야 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한소은 아나운서의 아침 프로그램에는 요즘 가장 인기 많은 아이돌 출신 배우가 게스트로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그가 전날 밤 과음으로 인터뷰가 어려운 상태가 됐다는 소식이 새벽에 전해졌다. 매니저가 다급하게 전화를 돌리는 소리를 옆에서 들었다. 대체 출연자가 급하게 필요했고, 회사는 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겠다며 나를 그 자리에 밀어 넣었다. 실장님은 회의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대중이 궁금한 건 강도현이 어떤 사람인지예요. 직접 나가서 얼굴 보여주고, 짧게 정리하고 들어오면 돼요. 그게 제일 빠른 방법입니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사람을 대체 출연자로 세우다니, 나는 그 결정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시점에 카메라 앞에 나서는 게 오히려 불을 더 지르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박할 힘도 없었다. 계약서에 서명한 순간부터 나는 회사가 정한 방향을 따라야 하는 처지였다. 그저 대본을 다시 펼쳐 마지막 줄까지 읽었다.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조명도 다 켜지지 않은 새벽이었다.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스태프들이 나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대기실 앞에서 처음으로 한소은을 만났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담백했다. 화려한 색조 대신 은은한 톤의 화장, 단정하게 넘긴 머리,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목소리. 청순한 이미지로 삼 년 연속 가장 좋아하는 여자 아나운서로 뽑힌 사람다웠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 나와주셔서 감사해요. 부담되시죠. 나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그녀는 그 말에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나를 다시 살폈다. 표정이 정말 괜찮아 보이진 않는데요. 그 말투는 캐묻는 게 아니라 그냥, 걱정하는 사람의 말투였다.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메이크업 담당자가 얼굴에 파우더를 두드리는 동안, 나는 눈을 감고 실장님이 마지막으로 강조했던 문장을 되풀이했다. 사생활은 사생활입니다. 배우로서 연기에만 집중하겠습니다. 이 문장만 지키면 된다. 딱 이 선까지만.
스튜디오 조명 아래 앉았을 때, 나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냉정하게, 필요한 말만. 방송이 시작되고 첫 질문이 들어왔다. 최근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는 준비한 대로 짧게 답했다. 사생활은 사생활입니다. 배우로서 연기에만 집중하겠습니다. 스튜디오 안에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카메라 감독이 살짝 눈썹을 올렸다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한소은이 예상 밖의 질문을 던졌다. 그럼 사진 속의 그 모습들, 전부 진짜인 거네요. 나는 대본에 없는 질문에 순간 말이 막혔다. 목이 타는 느낌이 들었고, 손등에 땀이 배어났다. 대답을 고르는 사이, 방청석에 있던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방송 진행 규칙을 어긴 즉석 질문이었다. 스태프들이 당황해서 서로 눈치를 봤다. PD가 부스 안에서 손을 흔들며 신호를 보냈지만, 이미 마이크는 그 아이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 아이가 물었다. 강도현 아저씨 진짜 고양이 좋아해요? 우리 학교 앞에서 봤어요. 아이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스튜디오 전체에 또렷하게 울렸다.
나는 순간 대본을 잊었다. 냉정해야 한다는 다짐도 잊었다. 응, 좋아해. 특히 골목에 사는 애들, 겨울에 춥잖아. 말이 저절로 나왔다. 내가 그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놀랐다. 이건 대본에 없는 대답이었다. 이건 회사가 정한 방어선을 넘어선 말이었다.
스튜디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가, 누군가 웃었다. 짧고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한소은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 표정에는 놀라움과 흥미가 함께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골목에서 밥은 어떻게 챙겨주세요? 이번에도 대본에 없는 질문이었지만, 나는 이미 대본을 놓친 상태였다.
그 뒤로 나는 대본을 완전히 놓쳤다.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료를 정해진 곳에 두고, 비 오는 날엔 상자를 덮어주고, 어떤 애는 이름도 지어줬다고. 스튜디오 스태프 몇 명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왜 그렇게까지 이미지를 지키려 했느냐는 질문에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흔들렸다. 무서워서요. 다정한 사람으로 보이면 아무도 저를 무서운 역할에 안 써줄까 봐. 데뷔했을 때부터 그랬어요. 무섭고 냉정한 이미지가 제 밥벌이였거든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십 년간 참았던 말이 방송 카메라 앞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서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한소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수건을 내 앞으로 밀어줬다. 방송이었다. 전국에 생방송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프로그램의 흐름보다 내 눈물을 먼저 신경 썼다. 나는 손수건을 받지 못하고 그냥 눈물을 닦았다. 손등으로, 소매 끝으로. 카메라가 정면에서 내 얼굴을 잡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스튜디오 스태프들이 서둘러 다음 코너로 넘어가려는데, 한소은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잠깐만요. 이 이야기는 조금 더 들어야 할 것 같은데요. PD가 부스 안에서 초조하게 손을 움직이는 게 보였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방송이 끝나고 나는 대기실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복도에 멍하니 서 있었다. 조명이 꺼진 복도는 유난히 서늘했다. 실장님의 전화가 계속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면서도 나는 받지 않았다. 방송 사고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제 정말 끝났구나, 회사에서 뭐라고 할까, 다음 계약이 있긴 할까. 그런데 휴대폰을 열어본 순간, 나는 예상과 완전히 다른 반응과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