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 다섯 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삼십 년을 살아오면서 몸에 새긴 습관이었다. 정확한 시간에 일어나고, 정확한 순서로 하루를 시작하고, 어떤 흐트러짐도 남에게 보이지 않는 것. 나는 강도현이었다. 스크린에서는 냉혹한 악역만 맡아온 배우, 눈빛 하나로 상대를 얼어붙게 만든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 그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나는 십 년 넘게 사생활이라는 걸 스스로 지워왔다.
물을 끓이기 전에 늘 하던 순서가 있었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반쯤 걷고,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커피포트에 붓는 것.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손끝으로 스위치를 누르고 물이 데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부엌 창가에 서서 아직 어둑한 골목을 내려다봤다. 이 시간의 골목은 늘 조용했다. 고양이 몇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신문 배달원이 자전거를 세워두고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정도. 나는 그 정적을 좋아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않는 시간, 아무도 나에게 뭔가를 기대하지 않는 시간이었으니까.
휴대폰을 확인한 건 물을 끓이던 중이었다. 화면을 켜는 순간 눈앞이 잠깐 흐릿해졌다. 부재중 전화가 열일곱 통, 문자는 셀 수도 없이 쌓여 있었다. 대표님, 실장님, 심지어 몇 년째 연락이 끊겼던 선배 배우까지. 손끝이 순간 차가워졌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직감이 먼저 왔다. 심장이 이상한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나는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끄지도 않고 소파에 앉아 첫 번째 문자를 눌렀다.
실장님이 보낸 링크였다. 제목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악역 전문 배우 강도현의 숨겨진 얼굴, 그는 사실 이런 사람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기사를 스크롤했다. 사진들이 이어졌다. 골목에서 폐지를 줍던 할머니의 리어카를 밀어주는 나, 동네 편의점 앞에서 길고양이에게 사료를 놓아주는 나, 촬영장 근처 초등학생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함께 걷는 나. 전부 내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을 때 한 일들이었다. 카메라가 없다고 믿었던 순간들이었다.
사진 밑에는 날짜와 장소까지 정확히 박혀 있었다. 심지어 내가 그 리어카를 밀어준 게 정확히 언제였는지, 몇 시 몇 분이었는지도 나와 있었다. 나는 그 정밀함에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 오래전부터 나를 따라다녔다는 뜻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한 달 전? 일 년 전?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래?
기자는 친절하게도 취재원까지 밝혀놓았다. 인근 상가 주인들, 촬영장 스태프들, 심지어 매니저였던 전임자까지. 그들의 입을 통해 나는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냉혹한 악역 강도현이 아니라, 성실하고 따뜻하고 다정한 삼십 대 남자. 기사 아래 달린 인용문을 읽었다. "그분이 그렇게 다정한 사람인 줄 몰랐어요. 늘 조용히 도와주고 갔거든요." 상가 주인의 말이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헛웃음이 났다. 조용히 도와주고 갔다니. 조용히 하려고 했던 건 사실이었다. 다만 그게 이렇게 세상에 다 까발려질 줄은 몰랐을 뿐이다.
나는 기사를 끝까지 읽지 못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커피포트에서 물 끓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서야 스위치를 끄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부엌으로 걸어가 스위치를 내리는 손끝이 평소보다 둔했다.
삼십 년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순간이 언제였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금이라고 답할 것이다. 배우로서 내가 쌓아온 건 단 하나의 이미지였다. 인간미가 없어야 했다. 다정함을 들키면 안 됐다. 그런데 그게 무너지고 있었다. 아니, 이미 무너졌다.
왜 하필 지금일까. 왜 하필 이번 작품이 개봉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나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들을 머릿속에서 굴리며 소파에 다시 앉았다. 휴대폰 화면에는 여전히 부재중 전화 알림이 쌓이고 있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대표님이었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세 배는 낮게 깔려 있었다. 지금 당장 회사로 와.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알았다. 오늘부로 내가 알던 강도현의 삶은 끝났다는 걸.
전화를 끊고도 나는 한동안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창밖으로 해가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저 빛을 보며 하루를 계획했을 텐데, 지금은 그 빛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셔츠 단추를 두 번이나 잘못 채웠다. 넥타이를 매려다 포기하고 그냥 셔츠 위에 재킷을 걸쳤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봤다. 익숙한 얼굴인데 낯설었다. 그동안 대중이 알던 얼굴이 아니라, 카메라 없이도 존재했던 진짜 얼굴이 거울 속에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한동안 마주 보다가, 결국 고개를 돌렸다.
현관을 나서기 전 나는 한 번 더 휴대폰을 확인했다. 실시간 검색어는 이미 손쓸 수 없이 번지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며 신발을 신었다. 평소라면 왼발부터, 다음에 오른발. 순서를 지키는 습관도 오늘만큼은 손이 엇갈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포털 사이트를 열었다. 실시간 검색어 1위에 내 이름이 있었다. 그 밑으로 관련 검색어들이 줄줄이 떴다. 강도현 미담, 강도현 반전, 강도현 이중생활. 나는 스크롤을 내리다가 한 댓글에서 손을 멈췄다. 이게 콘셉트야? 새로운 이미지 세탁 아니야? 어이없어서 웃음이 났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웃음이 났다. 그 아래로 또 다른 댓글이 붙었다. 이런 거 다 만들어낸 거 아니냐, 소속사가 짜고 친 거 아니냐. 나는 그 댓글들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인 걸 진짜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니. 차라리 연기였다면 마음이 편했을지도 몰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지하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휴대폰은 쉬지 않고 울렸다. 나는 결국 무음으로 바꿔버렸다. 차에 시동을 걸고 핸들을 잡은 손이 평소보다 뜨거웠다.
회사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기자 몇 명이 로비 앞에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 나는 잠깐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괜찮다, 이 정도는 겪어본 적 있다,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 등 뒤로 셔터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소리쳤다. 강도현 씨, 실제 성격에 대해 한마디만 해주세요! 다른 목소리가 곧바로 뒤따랐다. 이번 미담 기사, 사실입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정확히는, 어떤 대답을 해도 지금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로비로 들어서는 짧은 거리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는 순간까지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의 속도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십 년 넘게 배운 게 있다면, 흔들리는 모습을 카메라 앞에서 절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밀어 넣고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심장이 쿵쿵 울렸다. 문이 닫히기 직전, 로비 유리문 밖에서 한 여자가 나를 향해 휴대폰을 들이대는 게 보였다. 화면 속 실시간 방송이었다. 화면 상단에는 시청자 수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고, 옆으로 흐르는 댓글창에는 내 이름이 끊임없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 순간, 이 소란이 오늘 하루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예감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나는 벽에 등을 기댔다. 층수를 알리는 숫자가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심장도 함께 조여왔다. 대표님 방문 앞에 서기 전까지, 나는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오늘 하루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문이 열리고, 나는 복도로 발을 내디뎠다. 그 끝에 어떤 얼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