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계약서는 서류 세 장으로 끝나지 않았다. 부속조항이라며 대표가 추가로 내민 두 페이지에는 내가 읽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조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외출 전면 금지, 삼 주간. 개인 휴대폰 압수, 촬영용 스마트기기로 대체. 24시간 카메라 상시 촬영, 사생활 구역 없음. 화장실과 욕실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 렌즈가 설치된다는 조항. 식사 시간과 취침 시간까지 프로듀서가 편성하는 대로 따를 것. 그리고 마지막 줄.
'멤버 간 스킨십 및 애정 표현, 콘텐츠에 자연스럽게 노출될 것.'
나는 그 줄을 세 번 다시 읽었다. 글자들이 눈앞에서 흐릿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이게 정말 사람이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는 조건인가?
"이건 사생활 착취입니다."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건 생존입니다." 대표가 정정했다. 그 말투는 마치 자명한 진리를 설명하는 선생 같았다. "팬들에게 너희가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 이수아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보여줘야 해. 폭력적인 이미지를 상쇄할 방법은 그것뿐이야."
"제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잖아요."
"대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대표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마치 그 리듬이 자신의 논리를 증명해주는 것처럼. "네 반응 속도, 네 눈빛, 그날 무대에서 보여준 그 동작. 사람들은 이미 네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의심을 다른 그림으로 덮는 것뿐이야."
나는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관절이 시렸다.
"저항해봐야 소용없어." 정다은 언니가 낮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는 체념과 미안함이 뒤섞여 있었다. "이미 결정됐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안에서 최대한 안전하게 만드는 것뿐이야."
"언니는 이걸 안전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피했다. 그게 대답이었다.
나는 결국 서명했다. 펜 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 뭔가가 내 안에서 조용히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날로부터 이틀 후, 나는 서울 외곽의 한 저택 앞에 서 있었다. 높은 담장, 손질이 잘된 정원, 그리고 곳곳에 숨겨진 카메라 렌즈들. 렌즈는 화단 사이, 조명 기구 안, 심지어 정원석처럼 보이는 위장 케이스 속에도 박혀 있었다. 겉보기엔 화보 촬영지처럼 예쁘게 꾸며져 있었지만, 나에게는 그저 커다란 우리처럼 느껴졌다.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는데 문만 없는 우리.
"수아야!" 미소가 먼저 뛰어와 내 팔에 매달렸다. "우리 삼 주 동안 여기서 같이 산다는 거지? 완전 신나!"
미소의 웃음은 늘 그렇듯 순수하게 밝았다. 눈꼬리가 접히고, 이가 다 보일 정도로 벌어지는 그 웃음. 나는 그 웃음에 잠시 마음이 놓였다가, 곧 다시 굳었다. 저 웃음도 카메라를 의식한 것일까, 진심일까. 이제는 그 구분마저 흐려지고 있었다.
"긴장하지 마." 하주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길에 담긴 위로는 진심처럼 느껴졌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하주는 늘 위기 상황에서 초조할 때 다리를 꼬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 그녀의 다리도,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손끝은 웃고 있는데 발끝은 도망치고 싶어하는 사람. 나는 그 부조화를 오래 봐온 사람이었다.
소한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세련된 표정 아래, 나에 대한 감정이 뭔지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경계인지, 호기심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그리고 하늘이.
하늘이는 내 손을 조용히 잡았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괜찮아, 언니."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우리 다 같이 있으니까."
그 순간, 나는 이 모든 상황이 하늘이를 지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다시 상기했다. 이 부조리한 계약서에, 이 감시 카메라 숲 같은 저택에 서명한 진짜 이유. 하늘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담당 프로듀서가 우리를 맞았다. 스케줄표가 벽에 붙어 있었다. 아침 기상 시간, 아침 식사 촬영, 오전 자유 활동 콘텐츠, 오후 게임 촬영, 저녁 식사, 취침 준비까지 초 단위로 나뉜 것처럼 세밀하게 적혀 있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시면 됩니다." 프로듀서가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그냥 지켜볼 뿐이에요."
지켜볼 뿐이라는 말이 이렇게 소름 끼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첫날 밤은 조용히 지나갔다. 저택 안 카메라들은 우리가 함께 식사하고, 웃고, 대화하는 모습을 담았다. 대본은 없었지만 모두가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웃어야 하는지 몸에 익어 있었다. 미소는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하늘이 입에 넣어주었고, 하주는 소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어떻게 웃어야 할지 몰라 그냥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만 올린, 텅 빈 웃음.
식사가 끝난 후,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내 방은 이 층 끝, 창문이 정원 쪽으로 나 있는 곳이었다. 침대에 눕기 전, 나는 천장 구석의 작은 렌즈를 한참 바라보았다. 저 렌즈 뒤에는 누가 있을까. 지금 내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문제는 새벽에 벌어졌다.
나는 얕은 잠을 자고 있었다. 몸은 눕혀 있었지만, 감각은 늘 그렇듯 반쯤 깨어 있었다. 킬러 시절부터 몸에 새겨진 습관이었다. 완전히 잠들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나 소리에, 진동에, 공기의 흐름 변화에 절반은 열려 있는 감각.
그때, 창문 밖에서 미세한 소리가 났다.
스륵.
유리 표면을 무언가가 긋는 소리. 손톱이나 유리칼 같은 것이 표면을 스치는 소리. 나는 눈을 뜨는 순간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듯 뛰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판단을 내렸다.
방문 밖으로 나서자, 정원 쪽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움직였다. 검은 옷차림. 얼굴을 가린 형태.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움직임은 훈련된 사람의 것처럼 절제되어 있었다.
생각할 틈이 없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창문을 넘어 정원으로 내려섰고, 맨발이 차가운 잔디와 흙을 밟는 감각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그림자를 향해 달렸다. 그림자가 뒤돌아보는 순간 팔을 낚아채 그대로 바닥에 메다꽂았다.
"악!" 낮은 비명이 터졌다.
나는 무릎으로 상대의 등을 누르며 팔을 꺾었다. 관절이 꺾이는 감각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부러질 것이다. 그 판단이 냉정하게 스쳐 지나가는 나 자신이, 순간 낯설었다.
그 순간, 저택 곳곳의 조명이 일제히 켜졌다. 마치 무대의 막이 올라가듯, 어둠이 걷히고 정원 전체가 하얗게 드러났다.
정다은 언니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그 뒤로 대표의 비서까지, 잠옷 위에 카디건만 걸친 채로.
"수아야, 그만!" 언니가 소리쳤다.
나는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 상대의 마스크를 벗겼다. 손가락이 떨리는 걸 억지로 참았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회사 소속 스턴트 코디네이터. 촬영장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늘 웃는 얼굴로 안전벨트를 채워주던 사람.
"이게..." 나는 말을 잃었다.
"시험이었어." 정다은 언니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얼굴에는 미안함과 당황함이 뒤섞여 있었다. "대표님이 지시하신 거야. 안전 대응 능력을 확인해보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이 차갑게 식어갔다. 밤바람이 맨발과 잠옷 사이로 스며들었지만, 그보다 더 차가운 무언가가 내 안에서 퍼지고 있었다.
"이걸 시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내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누군가 진짜로 다칠 수 있었어요. 저 사람이 저항했으면, 아니면 제가 조금만 더 세게 눌렀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수아야, 나도 몰랐어. 정말이야." 언니의 눈에는 진심으로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그 눈빛만큼은 믿고 싶었다.
바닥에 눕혀진 코디네이터가 팔을 감싸며 신음했다. 비서가 다가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아무도 나에게 그가 괜찮은지 묻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하주와 소한, 미소가 소란에 잠에서 깨어 정원으로 나온 것이었다. 하늘이도 그 뒤를 따라왔다. 다들 잠옷 차림에, 눈에는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그 눈은 순식간에 또렷해졌다.
하주의 시선이 나를 훑었다. 혼란, 그다음엔 깨달음, 그리고 조심스러운 놀라움이 표정 위를 순서대로 스쳐 지나갔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
"수아, 너..." 소한이 입을 열었지만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은 내 손, 여전히 힘이 남아 있는 것처럼 굳어 있는 손끝에 머물러 있었다.
미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재잘거렸을 그 입이,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하늘이만이 조용히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떨림을 감추려는 듯 꽉 쥐었다. 그 온기가 유일하게 나를 이 세상에 붙들어두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시선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몸에 새겨진 반응이었을 뿐인데, 이제는 그마저도 나를 증명하는 증거가 되어버렸다. 내가 무엇이었는지, 내가 지금도 무엇인지.
"수아야." 정다은 언니가 나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목소리를 낮췄지만, 정원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서. "이 일, 대표님한테 보고할 수밖에 없어. 네 반응 속도가... 정상적인 수준이 아니었다고."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비서가 어딘가에 전화를 걸며 정원을 벗어났다. 코디네이터는 팔을 감싸 쥔 채 절뚝거리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나를 위로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저 다들 조금씩 거리를 두고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이 이 저택 안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카메라가 지키는 이 우리 안에서, 진짜 짐승은 바깥에서 들어온 침입자가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다음 날 아침, 저택에는 이상하게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식탁에 앉은 넷의 얼굴에는 어색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 미소는 카메라를 향한 것이었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어젯밤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넷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는 방식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조심스럽고, 거리를 둔,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무언가를 다루듯 하는 시선.
미소는 여전히 웃었지만, 예전처럼 내 팔에 매달리지 않았다. 하주는 다리를 꼬는 버릇을 숨기려는 듯 계속 자리를 고쳐 앉았다. 소한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게 보였다.
나는 그 아침 식사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초 단위로 짜인 스케줄표 위에서, 시간이 유독 더디게 흘렀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또 다른 위기가 이 저택을 향해 조용히 다가오고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정원 담장 너머 어딘가에서, 이미 다음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