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복수하는 마도구 설계사

4화

"백현 사범님께서 오늘 저택에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집사의 말에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붓끝에서 잉크가 한 방울 떨어져 설계도 귀퉁이를 얼룩지게 만들었지만,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마침 딱 맞는 시기였다. 증조부가 후원했던 마법 아카데미와 우리 가문 사이에 오랜 관계가 있었고, 사범들은 정기적으로 명문가를 방문해 어린 자제들의 마법 재능을 살핀다고 들었다. '재능을 살피러 온다는 사람이라면, 마도구 회로에 대해서도 뭔가 알겠지.' 머릿속으로 계산이 빠르게 굴러갔다. 아카데미 사범이라면 최소한 삼십 년은 마도구를 다뤘을 사람일 것이고, 그 정도 경력이면 내가 막힌 부분을 한눈에 짚어낼 확률이 높았다. 나는 급히 방으로 돌아가 어젯밤 완성한 소형 시제품을 챙겼다. 손바닥 크기의 마력석에 은사가 감긴 조악한 물건이었다. 겉으로는 볼품없어 보여도, 그 안에 새겨진 회로 하나하나는 밤을 새워가며 다듬은 것들이었다. 소리를 담을 수는 있었지만 재생은 아직 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마력을 흘려보내도 은사 안쪽에서 진동만 웅웅 울릴 뿐, 소리로 빠져나오지는 않았다. '분명 방향이 문제다. 마력이 들어가는 길과 나오는 길이 같아서는 안 되는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지만, 그 다음이 없었다. 책에도 없고, 증조부의 낡은 노트에도 없는 부분이었다. '이걸 보여주면 뭐라도 답이 나오겠지.' 응접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복도를 지나며 시녀 몇이 흠칫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평소 얌전히 걷던 아가씨가 이렇게 서두르는 모습이 낯설었을 것이다. 여하튼 지금은 체면을 차릴 여유가 없었다. 응접실 문을 열자, 창가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짧게 자른 붉은 머리가 창빛을 받아 불꽃처럼 반짝였다. 옷차림은 단정했지만 화려하지 않았다. 소매 끝에 마력 문양이 은은하게 새겨진 것으로 보아, 실용성을 우선하는 사람인 듯했다. 소문으로는 오십이 넘은 노장이라고 했는데, 눈앞의 남자는 이십 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요정의 혈통이 섞였다더니, 헛소문이 아니었나 보다.' 귀 끝이 살짝 뾰족한 게 눈에 들어왔다. 인간의 귀와는 미묘하게 다른 곡선이었다. 나는 속으로 놀라움을 삼키며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강서아라고 합니다." "백현입니다." 그는 짧게 대답하고 나를 훑어보았다. 시선이 내 손끝에 머물렀다. 은사에 긁힌 상처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손등에도, 손바닥 안쪽에도, 심지어 손목 가까이에도 붉은 줄이 몇 개나 나 있었다. 집사가 봤다면 또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게 분명한 상태였다. "손이 그게 뭡니까." 목소리에는 나이답지 않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외모는 이십 대인데 목소리는 확실히 노련하다. 요정 혈통 때문에 겉모습만 어려 보이는 게 맞는 것 같다.' "…연습을 하다가 그랬습니다."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연습이라니, 무슨 연습?"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 자리에서 정체를 다 드러내는 게 맞는 선택일까, 순간 고민이 스쳤다. 하지만 답을 구하려면 재료를 먼저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결국 시제품을 꺼내 보였다. "소리를 담는 마도구를 만들어보고 있습니다." 그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눈동자가 시제품 표면을 빠르게 훑는 게 보였다. 마력석의 결, 은사가 감긴 방향, 심지어 접합 부위의 미세한 틈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는 시선이었다. 그러다 그는 시제품을 받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손끝으로 은사를 살짝 튕겨보기도 했다. "이 회로 구성, 어디서 배웠습니까?" "증조부님이 남기신 자료로 독학했습니다." 그가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이번엔 훑어보는 게 아니라 평가하는 시선이었다. 마치 저울에 올려놓고 무게를 재는 듯한 눈빛이었다. "재생 회로가 없군요." "거기서 막혔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숨길 이유가 없었다. 숨긴다고 해서 답이 저절로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시제품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잠시 침묵했다. 톡, 톡, 규칙적인 소리가 응접실을 채웠다. 그 소리마저 어딘가 계산된 리듬처럼 느껴졌다. "왜 이걸 만들고 싶은 겁니까?" 질문이 갑작스러웠다. 나는 순간 대답을 고르다가, 결국 사실대로 말했다.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남기고 싶어서입니다. 부정할 수 없게." 말을 뱉고 나니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그 말 뒤에 숨은 얼굴 하나가 떠올랐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낼 이름은 아니었다. 그의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호기심과 흥미가 뒤섞인 눈이었다. "흥미로운 목적이군요." 그가 짧게 웃었다. 웃음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의외로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명성만큼 딱딱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재생 회로는 마력의 결을 거꾸로 감아야 합니다. 담을 때와 반대 방향으로." 그는 그 자리에서 회로도를 종이 위에 그려주었다. 선 하나하나가 정확하고 간결했다. 머뭇거림 없이 그려지는 선을 보니, 몸에 완전히 익은 지식이라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선이 교차하는 지점, 마력이 꺾이는 각도, 그 모든 것이 내가 몇 달 동안 헤매던 답이었다. '이게 지금까지 내가 못 찾았던 조각이다.' 몸속 어딘가가 화끈해지는 느낌이었다. 기쁨인지 조급함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를 써야 했다. 그가 종이를 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종이의 촉감이 유난히 매끄러웠다. 값비싼 재질이라는 게 손끝으로 바로 느껴졌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는 완성된 걸 보고 싶군요." 그의 눈에는 순수한 호기심 같은 게 담겨 있었다. 적어도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는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노장이라던 소문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그리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덧붙였다. 키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던 체격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로 남기려는 그 말, 누구의 것인지 언젠가 말해주십시오." 그 말이 응접실 공기를 순간 무겁게 만들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을 몇 번 뗐다가 다시 다물었을 뿐이다. 다만 그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가 문틈으로 사라질 때까지.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나는 손에 쥔 종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선명한 회로도 위로, 아까 그가 남긴 마지막 질문이 겹쳐 떠올랐다. 누구의 말을 남기려는 거냐고. '말할 수 없다.' 아직은, 절대로. 증거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 이름을 입 밖에 낼 생각이 없었다. 나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어 품 안에 넣었다. 이제 남은 건 시간뿐이었다. 그리고 이 회로도가 있다면, 그 시간은 생각보다 짧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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