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연회장의 소음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바이올린 선율, 잔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그 모든 소리를 뚫고 들어온 도현의 목소리.
"이런 몸으로 무슨 무도회에 나온답니까."
그 한마디를 던질 때 그의 입꼬리가 어떻게 올라갔는지,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렸다.
누군가는 웃음을 참는 듯 입가를 가렸고, 누군가는 동정하는 눈빛을 보냈는데, 그 동정이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었다.
도현의 목소리가 다시 재생되는 것 같아서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손끝이 떨렸다.
분한 건지 아픈 건지도 구분이 안 됐다.
가슴 한복판이 뜨겁게 죄어드는 느낌이었는데, 그게 화 때문인지 수치심 때문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울지 마.'
나는 스스로에게 명령했다.
울면 도현이 이기는 거다.
이 방에서 혼자 우는 것조차 그에게 지는 것 같았다.
이불 속은 어두웠고, 내 숨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버티던 나는, 문득 침대 밑 서랍 손잡이에 눈이 갔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서랍이었다.
손잡이의 놋쇠 부분은 이미 검게 변색되어 있었고, 그 위로 먼지가 얇게 켜켜이 쌓여 있는 게 촛불 아래서도 보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걸까.
열두 살 무렵, 나는 그 서랍 안에 온갖 잡동사니를 채워 넣었다.
부러진 마법 지팡이 끝동, 반쯤 타버린 마력석, 낡은 회로도.
가정교사에게 손등을 맞아가며 몰래 그린 것들이었다.
귀족 영애가 마법기구 따위에 손을 대는 건 천박하다고 했다.
그 말을 할 때 가정교사의 눈빛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손등에 떨어진 매의 통증보다 그 눈빛이 더 오래 남았다.
어머니는 내가 자수를 배우길 바랐고, 아버지는 내가 사교 예법에 능숙해지길 바랐다.
나는 둘 다 시늉만 냈을 뿐이다.
자수는 늘 실이 엉켰고, 사교 예법 시간에는 딴생각을 하다가 몇 번이나 지적을 받았다.
진짜로 몰두했던 건 오직 저 서랍 속의 잔해들이었다.
밤이 되면 몰래 촛불을 켜고, 가정교사가 압수하지 못한 부품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조립해보곤 했다.
그 시간만큼은 누구의 기대도,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서랍을 열었다.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손끝에 닿는 마력석의 감촉이 서늘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마력이 거의 빠져나간 돌이었다.
표면은 매끈했지만 예전처럼 은은한 빛을 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그 돌을 쥔 순간, 이상하게도 숨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방금까지 조여들던 가슴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맞아, 나는 이런 걸 좋아했다.'
견디는 것 말고, 만드는 것.
당하는 것 말고, 설계하는 것.
그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도현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아둘 수 있다면 어떨까.
그의 그 더러운 말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형태로 남겨둘 수 있다면.
머릿속에서 이미 몇 가지 가능성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잔해들을 침대 위에 쏟아부었다.
부러진 지팡이 끝동, 마력석 조각, 회로도.
작은 나사 몇 개와 이가 빠진 톱니바퀴도 함께 굴러떨어졌다.
손끝이 다시 떨렸는데, 이번엔 다른 이유였다.
분노가 아니라 흥분이었다.
'소리를 담는 마법기구.'
존재하지 않는 물건은 아니었다.
궁정 마법사들이 회의 기록용으로 쓴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궁정에서 돌아와, 회의 내용을 그대로 재생해 들려주는 신기한 마도구가 있다며 지나가듯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때는 그냥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만 흘려들었는데, 지금 와서 그 기억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그런 물건은 평민이 함부로 만질 수 없는 고급 마도구였고, 나는 그 원리조차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배운 적이 없다면 배워야 했다.
나는 회로도를 촛불 아래로 가져갔다.
어린 시절의 필체로 삐뚤빼뚤 그려진 도면이었지만, 지금 다시 보니 제법 논리가 서 있었다.
선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짚어가며 흐름을 따라가 보았다.
마력의 유입구, 증폭 회로, 그리고 출력부까지.
기억보다 훨씬 정교하게 짜여 있었는데, 그때의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그렸던 걸까.
'이 정도면 시작점은 될 수 있겠다.'
몇 군데 수정이 필요했다.
증폭 회로 부분은 지금 보기에도 비효율적이었고, 소리를 담는 매개체로는 이 마력석보다 더 안정적인 재료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도 뼈대는 나쁘지 않았다.
그때 방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이 시간에 돌아다닐 사람은 시녀 정도밖에 없을 터였다.
나는 재빨리 잔해들을 서랍 속으로 밀어 넣고 이불을 덮었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게 손끝까지 느껴졌다.
문이 살짝 열리고 시녀 하나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가씨, 아직 안 자세요?"
목소리에는 걱정과 조심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아마 연회장에서의 일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자려던 참이야."
나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최대한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시녀는 별다른 의심 없이 문을 닫았다.
발소리가 멀어지고서야 나는 다시 서랍을 열었다.
혹시 몰라 잠시 숨을 고르고, 문 밖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뒤였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회로도 위의 그림자도 함께 흔들렸다.
나는 그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그 흔들리는 그림자가 지금 내 마음 같았다.
불안하지만 꺼지지는 않는.
'이걸 완성하면, 도현이 자기 입으로 한 말을 부정할 수 없게 될 거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이었다.
말로 다투어봐야 소용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한 말을 교묘하게 뒤집었고, 주변 사람들은 늘 그의 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그 말 그대로를 담아낼 수 있다면.
그때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손끝의 마력석을 다시 쥐었다.
서늘하지만, 이상하게도 든든했다.
이 작은 돌 하나가 지금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무기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잠들지 않고 새벽을 맞았다.
촛불이 다 녹아 사라질 때까지, 회로도 위에 새로운 선을 몇 개 더 그려 넣으면서.
창밖이 서서히 밝아올 때쯖, 나는 완성된 도면을 앞에 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
이걸로 정말 도현의 말을 되돌려줄 수 있을까.
'된다.'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그 확신이 사그라들기 전에, 서둘러 필요한 재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