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창밖은 아직 푸르스름했다.
어젯밤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채였다.
머릿속에는 온통 회로도와 마력석의 배열만 맴돌았다.
'재료가 필요하다.'
마력석 조각 몇 개로는 시제품조차 만들 수 없었다.
그 조각들은 이미 절반 이상 순도가 떨어져 있었다.
제대로 된 소리 마도구를 만들려면 최소한 중급 마력석과 정련된 은사銀絲가 필요했다.
둘 다 이 저택 안에서는 구하기 힘든 물건이 아니었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지, 누구의 눈을 피해야 하는지였다.
만약 하녀나 시종의 눈에 걸리면 곧바로 부모님께 전해질 것이다.
'그러면 또 쓸데없는 일에 정신 팔지 말라는 소리를 들어야겠지.'
나는 그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옷을 갈아입으며 나는 오늘 하루의 동선을 미리 그려보았다.
서고, 창고, 그리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
가장 사람이 적은 시간대는 아침 식사 전, 바로 지금이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곧장 서고로 향했다.
청운 후작가의 서고는 오래된 문서들로 가득했지만, 그중 절반 이상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먼지 쌓인 장부들이었다.
책장 사이로 들어서자 특유의 마른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낡은 가죽 장정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이런 냄새는 오랫동안 방치된 지식의 흔적이었다.
나는 그 장부들 사이에서 가문의 재산 목록을 뒤졌다.
손끝에 먼지가 뽀얗게 묻었다.
'예전 조상 중에 마법사가 있었다고 했지.'
증조부가 젊었을 적 궁정 마법사였다는 이야기를 유모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당시엔 그냥 흘려들었던 이야기였는데, 지금은 그 말 한마디가 유일한 실마리였다.
장부를 몇 장 넘기다 보니, 후미진 창고 하나가 '연구용 물품 보관소'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목록에는 '봉인'이라는 단어가 함께 적혀 있었다.
봉인이라는 말이 오히려 흥미를 돋웠다.
'누군가는 이걸 숨기고 싶어했다는 뜻이겠지.'
숨긴 물건일수록 값어치가 있는 법이었다.
창고는 서고 뒤편 별채에 있었다.
나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곳으로 향했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발소리를 죽였다.
혹시라도 마주칠 하녀가 있을까 싶어 귀를 세웠지만, 이 시간엔 다들 주방에서 아침 준비로 바빴다.
문은 낡은 자물쇠 하나로만 잠겨 있었다.
자물쇠는 오랫동안 손을 대지 않은 듯 붉은 녹이 두껍게 앉아 있었다.
녹이 슨 자물쇠는 힘을 좀 주니 맥없이 부러졌다.
부러지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려서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 기척도 없었다.
창고 안은 상상보다 훨씬 넓었다.
먼지 쌓인 선반 위에 마력석 원석, 은사 뭉치, 부서진 회로판들이 널려 있었다.
선반 하나에는 낡은 도구함이 놓여 있었는데, 뚜껑을 열자 세공용 조각칼과 작은 렌즈까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증조부가 남긴 유산이 분명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필요한 재료들을 조심스럽게 챙겼다.
은사 뭉치는 손바닥 위에서 은근한 무게감을 냈다.
마력석 원석은 만지자마자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아직 살아 있는 돌이었다.
'이게 얼마나 오래 방치됐는지 모르는데, 이 정도로 마력이 남아 있다니.'
증조부가 얼마나 뛰어난 마법사였는지 짐작이 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우연히 낡은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편지는 선반 아래 상자 틈에 끼어 있어서, 조금만 늦게 봤어도 놓칠 뻔했다.
종이는 이미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글씨는 흐릿했지만 알아볼 수는 있었다.
편지에는 도현의 형, 권도훈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두 가문이 오래전부터 형제를 비교해왔다는 내용이었다.
형은 얌전하고 예의 바르며, 아우는 재기 있고 당당하다고.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잠시 손을 멈췄다.
'그 재기와 당당함이 지금 이 지경인가.'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비교당해 자란 아이가 비교를 견디지 못해 남을 짓밟는 어른으로 자란 거였다.
어릴 적부터 형과 비교당하며 컸다면, 그 안에 쌓인 열등감이 얼마나 깊었을지는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 열등감을 나에게 쏟아낼 이유는 되지 못했다.
동정은 되지 않았다.
이유가 어찌 됐든, 그가 나에게 쏟아낸 말들은 지워지지 않았다.
내 앞에서 비웃던 그 얼굴, 그 목소리의 결이 아직도 선명했다.
나는 편지를 다시 접어 원래 있던 자리에 놓아두었다.
동정할 시간에 만들 물건이 하나 늘어난 셈이었다.
창고를 나오면서 나는 부모님의 방 쪽을 지나쳤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는지, 안에서 두 분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귀에 들어왔다.
"그래도 도훈 도련님만큼 조용했으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둘째는 다 그런 법이지."
아버지가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큰 걱정보다는 그저 습관처럼 튀어나온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두 분 다 도현의 말버릇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의 성격이 형과 다르다는 걸 아쉬워하고 있었다.
'저 두 분도 결국 비교로 사람을 재는 거구나.'
편지 속 문장과 지금 들은 대화가 겹쳐지며,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가문이 다르고 시대가 달라도, 사람을 비교하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챙겨온 재료들을 서랍 옆에 늘어놓았다.
마력석 원석 세 개, 은사 뭉치 두 덩이, 부서진 회로판 조각 몇 개.
이 정도면 시제품 하나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사 뭉치를 만지자 손끝이 저릿했다.
마력이 살아 있는 재료였다.
이 저릿함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느끼는 생생한 감각이었다.
'이걸로 뭘 만들 수 있을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시작은 할 수 있었다.
나는 회로도를 다시 꺼내 은사의 배열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선을 그릴 때마다 머릿속에서 소리가 울려 퍼지는 마도구의 형태가 조금씩 구체화됐다.
작은 원형 장치, 그 안에 은사를 나선형으로 감고, 중심에 마력석을 박아 넣는 구조였다.
이론상으로는 소리를 증폭시키거나, 혹은 특정 파장만을 걸러낼 수 있을 것이다.
'후자라면 도청 방지에도 쓸 수 있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손이 더 바빠졌다.
창밖에서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나는 촛불을 켤 생각을 했다.
손끝은 이미 은사에 여러 번 긁혀 있었다.
작은 상처마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남았다.
따끔거렸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 작은 통증이야말로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촛불 아래서 은사를 감던 손이 문득 멈췄다.
문밖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이 시간에 내 방 근처를 지나갈 사람은 없어야 했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