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어머니, 도현 님이 또 그런 말을 했어요."
나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식탁 위에는 갓 구운 빵과 수프가 놓여 있었지만, 나는 냄새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어머니, 한혜숙 부인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찻잔이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사춘기 남자는 다 그렇단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사춘기라뇨. 도현 님은 이제 스물둘이에요."
"나이는 숫자일 뿐이지. 남자는 원래 마음이 늦게 자라는 법이야."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듣 가벼운 어조였다.
'스물둘이 사춘기라니.'
그 나이에 검을 잡고 영지를 관리하는 사람도 수두룩한데, 유독 도현 님만은 마음이 어리다는 이유로 모든 게 용납되는 모양이었다.
아버지, 강태윤 후작은 그제야 신문을 내리며 끼어들었다.
신문지 넘기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서아야, 그건 오히려 좋은 신호일지도 몰라."
"좋은 신호요?"
"남자가 무관심하면 그게 더 문제다. 관심이 있어야 그런 말도 하는 거지."
나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걸 느꼈다.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웃는 낯을 유지했다.
'관심의 표현이라니.'
그건 관심이 아니라 지배였다.
남의 몸을 깎아내리고, 남의 존재를 짓밟아서 자신이 우위에 서려는 짓이었다.
어제도 도현 님은 내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넌 손이 왜 그렇게 거칠어? 귀족 영애답게 좀 관리를 하란 말이야."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웃었다.
속으로는 회로판을 만지느라 생긴 상처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 눈에는 그저 어리광으로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온천 자작가와의 혼사는 우리 가문에도 이득이 크다."
아버지가 덧붙였다.
목소리에는 이미 결론이 나 있다는 확신이 배어 있었다.
그 말에 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포크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나는 태연히 수프를 한 술 떠먹었다.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뜨거운 액체의 온도만 느껴질 뿐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가슴 한가운데가 뜨겁게 타올랐다.
분노인지 서러움인지 구분이 안 됐다.
'저들에게 기대한 내가 어리석었다.'
부모라면 자식의 편이 되어줄 거라 믿었던 순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는구나.
나는 창가로 걸어가 잠시 밖을 내다보았다.
정원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저 나무들처럼, 흔들려도 뿌리는 뽑히지 않는 법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는 다시 서랍을 열었다.
어젯밤에 시작한 회로판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작은 은사들이 얽힌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마음을 정리했다.
부모의 인정도, 형제간 비교도, 다 필요 없었다.
필요한 건 오직 완성된 마법기구 하나였다.
그날부터 나는 완전히 잠행에 들어갔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회로를 짰다.
시녀에게는 몸이 좋지 않다고 둘러댔다.
시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문 앞에서 몇 번이나 물어보았지만, 나는 매번 괜찮다고만 대답했다.
"아가씨, 정말 괜찮으세요? 안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
"괜찮아. 그냥 좀 쉬고 싶어서 그래."
거짓말이 늘어갈수록 마음 한편이 조금씩 무거워졌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손끝은 은사에 긁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마력석을 다루다 손바닥을 데인 적도 있었다.
그날은 통증이 어깨까지 타고 올라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순간, 지금까지 버텨온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았다.
사흘째 되던 날, 나는 처음으로 소리를 담는 데 성공했다.
작은 마력석 안에 미세한 빛이 깜빡이는 순간, 나는 숨을 죽였다.
"테스트."
작은 마력석에서 내 목소리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손이 떨렸다.
그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라, 확실한 결과물을 마주한 데서 오는 흔들림이었다.
감격이라기보다는, 어떤 확신 같은 감정이었다.
'해냈다.'
'이제 재생만 되면 된다.'
나는 그 작은 마력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증조부가 남긴 낡은 회로판 조각들이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재생 회로는 훨씬 더 복잡했다.
증조부의 회로판 잔해로는 부족했다.
나는 며칠을 더 매달려 보았지만, 회로는 특정 지점에서 계속 끊어졌다.
몇 번이고 다시 그려보고, 은사를 다시 감아보아도 결과는 같았다.
나는 벽에 붙여둔 도면을 노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면 위에는 수십 번 고쳐 그린 선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이 이상은 나 혼자로는 무리다.'
독학으로는 벽에 부딪혔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인정한 후에는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마법기구의 재생 원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궁정 마법사들이 쓰는 고급 회로 이론을 다룰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내 정체를 함부로 발설하지 않을 만한 사람.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궁정에서 가끔 후작가에 방문한다는 마법사 사범의 이름을 떠올렸다.
백현.
소문으로는 실력이 뛰어나지만 성격이 괴짜라고 했다.
시녀들 사이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오갔다.
"그분은 말이 너무 없으셔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니까요."
"그래도 실력은 왕궁에서도 인정받는다잖아."
그 대화를 엿들으며, 나는 그 이름을 다시 곱씹었다.
괴짜라는 평판이 오히려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사교성이 아니라 실력이었으니까.
'만나야 한다.'
나는 그 이름을 종이에 적어놓고, 오랫동안 지우지 않았다.
펜을 쥔 손끝이 다시 상처 위를 스쳤지만, 그 통증조차 지금은 사소하게 느껴졌다.
문제는 어떻게 그를 만나느냐였다.
후작가에 드나든다는 그를, 후작 영애인 내가 직접 찾아가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모님이 알게 되면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알 수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종이 위의 이름을 손끝으로 짚으며, 머릿속으로 몇 가지 계획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계획들 중 하나가, 며칠 후 나를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이끌게 될 줄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