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설린의 기운이 계곡 전체를 짓눌렀다.
나는 발밑의 바위에 미세한 균열이 가는 걸 느꼈다.
쩌적, 쩌적.
돌이 갈라지는 소리가 심장 박동보다 빨랐다.
'이거 진짜로 죽을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도망칠 곳도 없었다.
계곡 양옆은 절벽이었고, 뒤는 폭포였고, 앞은 설린이었다.
'선택지가 없다는 게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농담으로 넘기려 해도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순환진을 다시 돌렸다.
십 년 동안 다듬어온 유아형 순환진은 이제 성인급 경락에 맞춘 개량형이 되어 있었다.
[선협 개정판 - 압력 최대 출력 가능]
'이제야 좀 쓸 만해졌네.'
십 년 전엔 이 진법 하나 돌리는 데도 코피가 났었는데.
지금은 코피 대신 식은땀만 흘렀다.
그것도 발전이라면 발전이었다.
설린이 먼저 움직였다.
인간 형태 그대로였지만, 걸음 한 번에 지면이 움푹 꺼졌다.
콰득.
땅이 신발 도장처럼 찍혀 들어갔다.
나는 몸을 낮추고 검을 비틀었다.
콰앙!
검과 손이 부딫혔다.
설린은 무기 없이 손으로만 상대하고 있었다.
'맨손으로 검을 막다니, 이건 좀 너무한데.'
이러니 무협 만화에서 나오던 "저는 무기가 필요 없습니다" 하던 대사가 진짜였구나 싶었다.
충격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순환진이 그 충격을 나눠 흡수했다.
찌잉-!
몸속에서 기운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감각이 들었다.
나는 뒤로 밀리며 자세를 고쳤다.
설린의 눈빛에 처음으로 놀란 기색이 스쳤다.
"검이 성기급인데, 그 위력은 신기급 못지않군." 설린이 말했다.
'검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인 거지, 라고 말하고 싶지만 참는다.'
칭찬인지 경고인지 애매한 말이었다.
일단 나는 웃어넘겼다.
"과찬이십니다." 나는 답했다.
'속으로는 십 년 갈아 넣은 순환진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지만.'
다시 붙었다.
서걱, 콰앙, 촤악.
의성어만으로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빠른 교환이 이어졌다.
숨 한 번 들이켤 틈도 없이 검이 오갔다.
나는 열 수를 넘기지 못하고 밀려났다.
설린의 실력은 확실히 성역급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압도당하는 것도 아니었다.
'몸이 성장할수록 격차가 줄어들고 있어.'
나는 그 사실을 검을 맞부딫는 순간마다 확인했다.
한 수, 한 수 나눌 때마다 밀리는 폭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체감상으로는 시험 성적이 30점에서 35점으로 오르는 정도였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 5점이 목숨값이었다.
영혼의 격은 이미 성역급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다만 몸이, 그 격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릇이 작아서 못 담는 거지, 원래는 나도 잘나가는 몸이었다고.'
이런 자기 정신승리라도 안 하면 버틸 수가 없었다.
순환진의 압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경고: 경락 부하 87%]
'조금만 더.'
검신에서 청광이 짙어졌다.
빛이 손잡이를 타고 올라와 손목까지 저릿하게 만들었다.
이 정도 부하면 웬만한 사람은 팔이 통째로 날아갔을 텐데, 순환진이 그걸 십분의 일 정도로 나눠 흡수하고 있었다.
'그래, 십 년 고생한 게 이럴 때 써야지.'
나는 마지막 초식을 꺼냈다.
십 년 전, 비무 중에 완성하지 못했던 그 검로.
역천삼검(逆天三劒), 세 번째 수까지 이어지는 연환.
첫 수가 설린의 왼팔을 스쳤다.
"오호." 설린이 짧게 감탄했다.
두 번째 수가 그의 옆구리를 노렸다.
설린이 몸을 틀며 피했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청색 상처가 스치듯 남았다.
상처에서 흐른 게 피가 아니라 푸른 빛이었다는 게, 이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새삼 다시 알려줬다.
세 번째 수.
이 초식의 진짜 핵심은 세 번째였다.
앞선 두 수로 상대의 무게중심을 흔들어놓고, 마지막 수로 그 틈을 파고드는 것.
설린의 다음 동작이 눈앞에 그려졌다.
'저기로 몸을 뺄 거다.'
십 년 전엔 이 예측 단계에서 항상 틀렸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확신이 들었다.
나는 검을 내질렀다.
촤아악-!
검끝이 설린의 목젖 바로 앞, 종이 한 장 거리에서 멈췄다.
십 년 전, 비무 중에 상대의 목젖 앞에서 멈췄던 그 거리와 똑같았다.
'이번엔 진짜로 멈춘 거 맞겠지.'
손목이 미세하게 흔들려서, 순간 진짜로 베어버리는 줄 알고 나 스스로가 더 놀랐다.
계곡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물소리만 콸콸 들렸다.
설린이 나를 내려다봤다.
눈빛에 이제는 완연한 존중이 담겨 있었다.
"졌군." 설린이 인정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나는 겸손을 떨었다.
'운은 아니고 사실 십 년 준비한 거긴 한데.'
말은 겸손하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어깨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설린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성역 중기급인 나를, 이 몸으로 이겨놓고 운이라고 하다니." 설린이 말했다.
"동등한 실력자로 인정하지." 설린이 덧붙였다.
그 순간, 나는 뭔가 뿌듯함과 동시에 불안함을 느꼈다.
'인정받는 건 좋지만, 이게 조용히 지내려던 계획에 얼마나 방해가 될까.'
용 한 마리가 "저 사람 강자다"라고 소문내고 다니면, 그건 이제 은둔이 아니라 유명인이 되는 지름길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설린이 다시 말했다.
"또 조건?" 나는 되물었다.
'아까 시험 조건 걸 때도 무섭더니, 이번엔 뭘 요구하려고.'
"이 계곡, 아니 폭포 일대 전부를 네가 써도 좋다." 설린이 말했다.
"내 영역의 일부를 거점으로 내어주지." 설린이 덧붙였다.
'생각보다 이득인데.'
나는 잠시 계산했다.
안전한 거점, 강자의 조력, 그리고 정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세 가지였다.
수능 만점보다 이게 더 값어치 있었다.
"조건 받겠습니다." 나는 답했다.
"단, 하나만." 나는 덧붙였다.
"뭐지?" 설린이 물었다.
"아까 그 사냥꾼들 소문, 어떻게 좀 안 될까요." 나는 물었다.
설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늦었다." 설린이 말했다.
"지금쯤 근처 마을에 도착했을 시간인데." 설린이 덧붙였다.
'아, 진짜.'
나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십 년의 은둔이 이 짧은 오후 한나절로 흔들리고 있었다.
'십 년 농사 하루아침에 망하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그날 저녁, 설린의 안내로 나는 폭포 뒤편의 동굴에 자리를 잡았다.
오랫동안 숨어 지낸 계곡보다 훨씬 안전하고 넓은 공간이었다.
천장이 높아서 목검을 마음껏 휘둘러도 부딪힐 게 없었고, 바닥은 이상하게 뽀송뽀송했다.
'용이 사는 곳이라 이런 것도 관리가 되나.'
설린은 인간 형태로 맞은편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앉은 자세 하나에도 위압감이 배어 나왔다.
"이 대륙에 대해 좀 알려주십쇼." 나는 물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설린이 되물었다.
"기본적인 세력, 등급 체계, 그런 것부터요." 나는 답했다.
'교과서 첫 페이지부터 배워야 하는 처지라니, 십 년 만에 다시 초등학생 된 기분이다.'
설린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운대륙은 크게 세 개의 상위 세력이 나눠 지배하고 있다는 것.
그 위에 소수의 초월적 존재들, 그리고 그들이 관리하는 성역이라는 지역들이 존재한다는 것.
설린은 손가락으로 바위 위에 지도 비슷한 걸 그려가며 설명했다.
선이 하나 늘어날 때마다 내 머릿속엔 새로운 이름과 세력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나하나 새겨들었다.
'이거 필기라도 해야 하나.'
종이가 없어서 그냥 머릿속 노트에 꾹꾹 눌러 적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동굴 밖에서 설린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지도를 그리던 손가락이 뚝 멈췄다.
"뭔가 온다." 설린이 낮게 말했다.
"마수?" 나는 물었다.
"아니." 설린이 답했다.
"사람이다. 그것도 상당히 격이 높은." 설린이 덧붙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잡았다.
방금 전까지 대륙 지리 수업을 듣던 학생 모드에서, 다시 검을 쥐는 모드로 바뀌는 데 걸린 시간은 채 일 초도 되지 않았다.
'벌써 찾아오는 건가.'
낮에 있었던 그 소문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설린의 눈빛이 다시 진지해졌다.
동굴 밖 어둠 속에서, 발소리 하나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