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검이 멈췄다.
정확히는, 내가 멈췄다.
상대의 목젖 바로 앞, 종이 한 장 거리에서 검끝이 떨었다.
'여기서 더 밀어붙이면 이긴다.'
확신이 있었다.
상대의 자세, 호흡, 그리고 아까부터 미세하게 떨리던 왼쪽 발끝까지.
전부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걸 봤다.
상대의 손목이 꺾이는 각도, 무게중심이 흐트러지는 순간, 그 틈에 숨어 있는 반격의 씨앗.
예전부터 연구하던 것이었다.
'역천삼검(逆天三劒)'.
이름부터 오지다.
하늘을 거스르는 세 번의 검.
사실 별거 없었다.
찰나의 틈에서 세 수를 앞서 보는 검로일 뿐이었는데, 문제는 그 '찰나'를 실전에서 만드는 게 죽도록 어려웠다는 거다.
이론상으론 완벽했다.
머릿속으로는 수백 번도 더 그려봤다.
첫 수로 손목을 흔들고, 두 번째 수로 중심을 무너뜨리고, 세 번째 수로 끝낸다.
그런데 실전은 매번 다르게 흘렀다.
상대가 사람이라면 항상 변수가 생겼고, 그 변수를 억지로 끼워 맞추다 보면 검로가 뭉개졌다.
지금이 딱 그 순간이었다.
'세 수째... 여기서 이어붙일 수 있나?'
나는 검끝을 아주 살짝,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 틀었다.
"거기서 뭐 하냐!" 상대가 소리쳤다.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비무 도중에 갑자기 멈춰 서서 딴생각을 하는 놈을 상대하는 기분이 어떤지, 나도 안다.
당해본 적은 없지만 아마 짜증 날 거다.
"잠깐, 생각 좀." 나는 태연히 답했다.
'비무 중에 생각을 하는 놈이 어디 있냐.'
나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좀 반칙이었다.
정상적인 비무라면 흐름이 끊기는 순간 승부는 이미 끝났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 끊긴 흐름 속에서 오히려 새로운 걸 봤다.
상대의 어깨가 아주 조금, 각도가 틀어져 있었다.
'저기다.'
세 번째 수가 완성됐다.
그 순간이었다.
검끝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처음엔 조명 반사인가 했다.
'아, 저 위에 조명이 있었나?'
아니었다.
빛은 안쪽에서 배어 나오고 있었다.
검신 자체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검이 시간을 되감기 시작한 것처럼.
빛의 결이 검신을 따라 거꾸로 흐르는 게 보였다.
물이 위로 흐르는 것처럼,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광경이었다.
[경고: 인과율 역행 감지]
어? 이건 또 뭔 소리야.
살면서 그런 문구를 본 적이 없었다.
이십 년 넘게 검을 잡고 살아왔지만 검에서 시스템 메시지가 뜨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혹시 이거... 상태 이상 디버프 같은 거 아니야?'
당황할 새도 없었다.
주변 소음이 갑자기 뭉개졌다.
관중석에서 나던 함성도, 상대의 숨소리도, 전부 물속에 잠긴 것처럼 먹먹해졌다.
번쩍-!
시야가 하얗게 타올랐다.
눈앞이 완전히 새하얘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귓속에서 종소리 같은 게 울렸다.
땡- 하고, 아주 길게.
머리가 울릴 정도로.
그리고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도, 감각도, 아무것도.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냄새였다.
젖은 흙, 오래된 나무, 그리고 어딘가 비릿한 짐승 냄새.
'여기 어디 목욕탕 아니지, 확실히.'
익숙하지 않은 냄새들이 코를 찔렀다.
두 번째로 느낀 건 손이었다.
작았다.
너무 작았다.
나는 내 손을 들어 얼굴 앞에 갖다 댔다.
'이거... 내 손 맞나?'
손가락이 통통했다.
손톱도 조막만 했다.
마치 유치원 졸업 사진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손이었다.
나는 그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폈다.
주먹을 쥐어봤는데 위협적이기는커녕 그냥 만두 같았다.
'누가 이 손으로 검을 잡으라고 하면 웃길 것 같은데.'
그런데 웃을 수가 없었다.
왜냐면 내가 지금 그 손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제야 나는 내 몸을 내려다봤다.
키가 작았다.
옷이 헐렁했다.
아니, 옷이 헐렁한 게 아니라 몸이 옷보다 훨씬 작았다.
대충 계산해보니 여섯 살쯤 되는 몸이었다.
원래 입고 있던 도복이 이불처럼 몸을 덮고 있었다.
소매 끝이 발등까지 늘어져 있었고, 허리끈은 세 바퀴는 돌려 감아야 겨우 묶일 것 같았다.
찌잉-!
머리 안쪽에서 뭔가가 울렸다.
[신체 정보]
연령: 6세 (추정)
종족: 인간
영혼 등급: 선천대원만 경계 (초입)
육신 등급: 유아기 (전투 불가급)
'영혼은 최상위, 몸은 최하위라니.'
이거 완전 사기 캐릭터를 만들다가 밸런스 조정 실패한 게임 같지 않나.
능력치는 만렙인데 레벨 제한에 걸려서 스킬을 못 쓰는 그런 느낌.
과거 어디선가 봤던 게임이 딱 이랬다.
전설급 장비를 초반에 얻었는데 레벨이 낮아서 착용조차 못하는, 그런 기획 실수.
내가 지금 그 실수의 산증인이 된 셈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여섯 살 몸으로 나오는 한숨은 왠지 더 처량하게 들렸다.
목소리도 얇고 가늘어서, 한숨 하나에도 서글픔이 두 배로 묻어났다.
'이러다 울음소리까지 여섯 살처럼 나오면 진짜 웃긴다.'
시험 삼아 작게 소리를 내봤다.
"으음..."
그냥 애 목소리였다.
아무 위엄도 없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숲이었다.
본 적 없는 나무들, 본 적 없는 색의 꽃들.
나무 기둥은 하나같이 뒤틀린 나선형이었고, 잎사귀는 보랏빛에 가까웠다.
꽃은 더 이상했다.
꽃잎이 마치 젤리처럼 반투명했는데, 그 안에서 작은 빛 알갱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하늘은 지구보다 한 톤 더 짙은 청색이었다.
낮인 건 확실한데, 해가 어디 떠 있는지 감이 안 잡혔다.
'여기가 어디야.'
지구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애초에 이 정도로 색감이 이상한 곳은 지구에서 본 적이 없었다.
관광이라면 신났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냥 무서웠다.
나는 허리춤을 더듬었다.
검이 있었다.
'있다!'
순간 안도감이 밀려왔다.
용천검.
내 사문의 신기(神器), 대대로 종주만이 쥘 수 있다던 검.
비무 직전까지 내 허리에 걸려 있던 그 검이 지금도 여기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몸은 여섯 살이 됐어도 검만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나는 검을 뽑았다.
촤앙-.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은은한 신광이... 없었다.
대신 흐릿한 청광 한 줄기가 겨우 새어 나올 뿐이었다.
[용천검 상태: 신기(神器)→성기(聖器) 등급 강하]
'뭐?'
나는 검을 다시 살폈다.
분명 같은 검이었다.
손잡이의 문양, 검신의 결, 그 모든 게 똑같았다.
손잡이에 새겨진 용의 비늘 문양까지도 하나 흐트러진 것 없이 그대로였다.
하지만 격이 떨어져 있었다.
신기에서 성기로.
한 단계, 아니 사실상 몇 단계는 아래로.
예전엔 검을 뽑기만 해도 주변 공기가 눌리는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그냥... 날카로운 쇳조각 같았다.
'검도 나랑 같이 회춘했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영혼은 정점에 가깝고, 몸은 갓난쟁이 수준이고, 신기는 격이 떨어진 성기가 되고.
이거 완전 삼중 재난 아닌가.
거기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몸은 검 한 자루 제대로 들기도 힘든 상태였다.
'재난이 삼중이 아니라 사중, 오중인가.'
세어보다가 그만뒀다.
세는 게 더 슬퍼질 것 같았다.
부스럭.
숲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뭔가 큰 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뒤이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땅이 아주 미세하게 울렸다.
'이 정도 진동이면... 최소 몸무게가 나 몇 배는 되는 놈인데.'
나는 검을 다잡았다.
손이 떨렸다.
검을 쥐는 힘조차, 여섯 살 아이의 힘이었다.
손잡이를 감싸는 손가락이 반도 채 닿지 않았다.
평소라면 한 손으로도 태산을 가를 것 같던 검이, 지금은 무겁게만 느껴졌다.
두 팔로 겨우 들어 올려도 팔이 후들거렸다.
'이걸로 뭘 어떻게 하라고.'
'설마... 저게 나를 노리는 건가.'
숲의 그늘 사이로 붉은 눈 두 개가 나를 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데도 그 눈이 서서히 커지는 게 보였다.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발, 초식동물이라고 해줘.'
간절히 빌었지만, 저 붉은 눈빛은 아무리 봐도 풀 뜯어먹는 놈의 눈이 아니었다.
이대로면 여섯 살짜리 아이 몸으로, 격이 떨어진 검 한 자루 들고, 저 정체불명의 괴물과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 소리마저 지금은 너무 크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