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명의 만렙 검신

4화

기척은 셋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유독 컸다. 계곡 어귀, 딱 그 경계선에서 그들이 멈췄다. 바람 방향이 바뀌면서 피 냄새가 그쪽으로 넘어갔을 거다. 말들이 먼저 뒷걸음질을 쳤다. "저, 저기... 용이랑 애가 같이 있는데?" 한 명이 소리쳤다. '애? 또 애 소리.' 나는 슬쩍 표정을 굳혔다. 외모가 나이보다 어리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이렇게 매번 마주칠 때마다 애 소리를 들으니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십 년을 갈아 넣었는데, 겉모습은 여전히 고등학생 같단 말이지.' 솔직히 좀 억울했다. 내가 저기 쓰러져 있는 마수 떼를 다 정리했다는 걸 안다면, 저 사냥꾼들 표정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기도 했다. 설린이 먼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은빛 머리가 천천히 돌아가는데, 그 움직임 하나만으로 사냥꾼들의 말이 전부 주저앉을 뻔했다. "근처를 지나던 사냥꾼들이군." 설린이 말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서 귀찮음이 뚝뚝 묻어났다. '용도 사람 많은 걸 귀찮아하는구나. 이거 좀 공감되네.' "저 마수 떼 소리를 듣고 몰려온 모양이야." 나는 짐작했다. 계곡 하나를 통째로 뒤집어놓은 굉음이었으니, 근처에 있던 사냥꾼들이 몰려드는 건 당연했다. 문제는 그 굉음의 결과물이 너무 노골적으로 널려 있다는 거였다. 사냥꾼들은 계곡 안의 광경, 정확히는 수십 마리 마수 사체와 그 위에 서 있는 용과 소년을 보고 한참을 굳어 있었다. 말들도 이미 앞다리를 후들거리고 있었다. 한 명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 입만 뻐끔거렸고, 다른 하나는 아예 창을 놓칠 뻔했다. '저 반응, 이해는 간다. 나도 처음 저 마수 떼 봤을 때 비슷했으니까.' 그러다 하나가 소리쳤다. "저, 저게... 성역 중기급 용인 설린 님?"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반쯤 갈라져 있었다. '성역 중기급이라니.' 나는 힐끗 설린을 봤다. 이 세계엔 등급이란 게 확실히 있었다. 하급, 중급, 상급, 그리고 그 위에 성역급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인간으로 치면 하급은 동네 조기 축구회, 중급은 아마추어 리그, 상급은 프로 리그쯤 되겠고, 성역급이라면... 뭐, 국가대표를 넘어 전설의 은퇴 선수 컴백전 수준이랄까. 설린이 그 성역급 중에서도 '중기급'이라면, 이미 이 세계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런 게 지금 내 옆에서 심심하다고 나랑 놀아준다는 건데.' 생각할수록 상황이 좀 이상했다. "저 소년은 대체 누구야, 저 정도 마수 떼를 다 정리했는데?" 다른 사냥꾼이 물었다. 떨리는 목소리에 경외심이 섞여 있었다. 설린이 대답 대신 나를 슬쩍 쳐다봤다. '이 눈빛, 뭔가 묘하게 재밌어하는 표정인데.' 옆에 있어보니 이 용은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대신, 눈빛으로 은근히 장난기를 드러내는 타입이었다. "모르는 게 좋을 텐데." 설린이 말했다. 한 문장인데도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 한마디에 사냥꾼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누군가는 고개를 젓고, 누군가는 급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말을 돌린 그들이 서둘러 계곡을 빠져나갔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저거 어째, 소문 나겠는데.' 나는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냥꾼들 사이의 정보망이 얼마나 빠른지는 몰라도, 저 정도 놀란 표정을 하고 돌아간 사람들이 입을 다물 리는 없었다. "안 막아도 되나?" 나는 물었다. "막을 방법이 없지. 인간의 입을." 설린이 답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다는 투였다. '그건 니가 초식동물처럼 산속에서 조용히 살아서 그런 거고.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 한다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십 년을 조용히 숨어 지내며 몸을 만든 이유가, 아직 완전한 성인이 아닌 지금,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면 곤란해서였다. 힘은 있어도 인지도가 없는 상태로, 아무도 모르게 조금 더 성장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게 내 전략이었다.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실력만 차곡차곡 쌓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짜잔, 하고 튀어나오는. 말하자면 나 혼자 준비하는 서프라이즈 파티였다. 근데 그 파티가 방금, 초대장도 안 돌렸는데 손님이 다 와버린 느낌이었다. 계획이 반쯤 무너진 셈이었다. "어차피 소문은 부풀려질 테니 걱정 마." 설린이 덧붙였다. "부풀려지는 게 더 문제인데요." 나는 대꾸했다. '애가 마수 떼를 정리했다는 얘기가 어떻게 부풀려질지 상상도 안 가는데. 어린애가 용이랑 손잡고 마수 학살했다더라, 이런 식으로 퍼지면 그거 완전 괴담 아니야.'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설린이 인간 형태로 변했다. 순식간에 거체가 줄어들면서 은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옷차림은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고풍스러운 은색 로브 같은 거였는데, 그 와중에도 걸음걸이에 거만함이 뚝뚝 흘렀다. '변신도 하네. 완전 소환수 조력자 컨셉인데.' 어릴 때 봤던 옛날 판타지물 주인공 조연이 딱 이런 느낌이었다. 압도적인 실력에, 거만함에, 은근한 츤데레 기질까지. "본 모습으로도 그렇게 강한데, 사람 모습으로는 더 편하겠지." 설린이 말했다. 걸음걸이부터 거만함이 뚝뚝 흘렀다. "그래서, 아까 물었던 거 답은 안 해줬는데." 나는 다시 물었다. "뭘." 설린이 되물었다. "우리 전에 만난 적 있냐고." 설린이 잠시 미간을 좁혔다. 기억을 더듬는 표정이었다. 그 짧은 정지 시간이 왠지 웃겼다. 용이 인간의 기억을 더듬는 얼굴이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신기한 조합이었다. "십 년쯤 전, 계곡 초입에서 조그만 인간 아이 하나를 본 적이 있긴 하다." 설린이 말했다. "놀라서 도망치던 모습이 기억나는군." 설린이 덧붙였다. 입가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맞다, 그때 그거였구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십 년 전 그날의 기억이 순식간에 재생됐다. 산속에서 뭘 좀 캐다가 갑자기 하늘을 뒤덮는 그림자를 봤고, 그대로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뛰었던 기억. 지금 생각하면 흑역사였다. "그게 나였습니다." 나는 말했다. 설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그 짧은 세월 사이에 이 정도로 성장했다는 건가." 설린이 물었다. 목소리에 놀람이 실려 있었다. "십 년이면 짧은 세월은 아니죠." 나는 대꾸했다. "용에게는 짧다." 설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니 기준이고. 인간은 십 년이면 초등학생이 대학 갈 나이라고.' 기준이 다르니 대화가 자꾸 미묘하게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설린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시선이 특히 허리춤에 오래 머물렀다. "네 검, 격이 낮아 보이는데." 설린이 말했다. 찔렸다. 정확히 정곡이었다. "보는 눈은 있네요." 나는 씁쓸하게 답했다. "본래는 신기급이었는데, 사연이 좀 있어서 성기로 떨어졌습니다." 나는 덧붙였다. 말하면서도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원래 있던 격을 잃은 무기를 들고 다니는 게, 마치 명품 브랜드 로고를 뗀 가방을 메고 다니는 느낌이랑 비슷했다. "검이 격을 잃었는데 그 정도 검로가 나온다는 건, 원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안 되는군." 설린이 말했다. 눈빛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적대감보다는 순수한 흥미 쪽으로. '이거, 나쁜 쪽으로 흘러가는 관심은 아닌 것 같은데.' 일단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실력을 인정한다면, 이 계곡 근처에서 좀 더 있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물었다. "안 될 거야 없지. 대신 조건이 있다." 설린이 말했다. "조건?" 나는 되물었다. '설마 계곡 청소하란 소리는 아니겠지.' 설린이 검지를 들었다. "한 번 더 겨뤄보자. 진심으로." 설린이 말했다. 입가에 걸린 웃음이, 방금 전 마수 떼를 학살하던 표정과는 전혀 다른, 순수한 승부욕에 가까웠다. '아까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는 거야?'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까 그 압도적인 거체가 마수들을 상대할 때조차 진심이 아니었다면, 진심을 냈을 때는 대체 어느 정도라는 건가. 나는 검을 다시 고쳐 잡았다. 손바닥에 땀이 살짝 배어났다. 하늘을 뒤덮던 그 거체를 상대로 진짜 승부라니, 지금 이 몸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도망치면, 그거야말로 십 년 전 그 꼬맹이랑 똑같은 거잖아.' 물러설 수도 없었다. 설린의 몸에서 은은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계곡 전체가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바람이 멈췄고, 남아 있던 마수의 피비린내마저 어딘가로 밀려나는 것 같았다. '이거, 아까 마수 정리할 때랑 완전히 결이 다르잖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험이라는 걸, 몸이 먼저 알아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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