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연무장을 벗어나 처소로 돌아가는 길, 온몸의 뼈마디가 다 아팠다.
걸을 때마다 갈비뼈가 신경을 긁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몇 걸음마다 벽을 짚고 숨을 골랐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옆구리 안쪽에서 뭔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는데, 실제로 소리가 나는 건 아니고 그냥 그런 착각이 든다는 게 더 무서웠다.
땀이 식으면서 등짝이 서늘해졌고, 입안에서는 아직도 피비린내가 감돌았다.
17황자 처소는 궁 외곽, 사실상 버려진 구역에 있었다.
지붕 기와가 몇 장 빠져 있었고, 정원엔 잡초가 무릎까지 올라와 있었다.
담벼락에는 이끼가 껴 있었고, 그 틈으로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게 보였다.
관리하는 사람도 없었다.
무맥 없는 황자에게 인력을 배정할 이유가 없다는 게, 이 궁의 논리였다.
이 정도면 차라리 폐가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지붕은 있고 문은 잠기니까, 감사해야 하는 걸까.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돌아왔구나.”
처소 문 앞에서 늙은 시종 하나가 나를 맞았다.
왕 노인이라고 불리는, 이 궁에서 유일하게 나를 사람 취급해주는 인물이었다.
등이 굽고 손등에 주름이 가득했지만, 눈빛만큼은 늘 맑았다.
“괜찮으십니까, 마마.”
“괜찮아 보이나요?”
왕 노인이 내 얼굴과 옷 상태를 훑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옷자락 여기저기에 흙과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으니, 안 봐도 답이 나오는 질문이긴 했다.
“또 3황자입니까.”
“이번엔 조금 더 시끄러웠습니다.”
“···그래도 살아 돌아오셨으니 다행입니다.”
기준이 참 낮은 다행이었다.
나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 침상에 몸을 던지듯 눕자, 왕 노인이 약재를 가지러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나는 천장을 보며 조금 전 뱉었던 말을 곱씹었다.
3개월 안에 유하린을 황궁에서 쫓아내겠다.
···미친 소리긴 했다.
힘도 없고, 세력도 없고, 심지어 지금 당장은 갈비뼈도 부러진 마당에.
게다가 상대는 무맥의 재능으로 이름 높은 7군주였다.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선언은 늘 힘보다 먼저 오는 법입니다.]
머릿속 목소리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럼 이제 힘을 어디서 구해야 하는데.’
[모르겠습니다.]
‘···그럼 그건 왜 말했어.’
[격언이니까요.]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전생의 잔영이라는 게, 위기 상황에서 도움이 될 때보다 안 될 때가 더 많았다.
마치 조언은 던지고 실행은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하다못해 격언집을 하나 통째로 외우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너 혹시 나한테 도움 되는 말은 하나도 모르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요.]
대답이 조금 늦게 나왔다.
그 잠깐의 침묵이 오히려 확신을 줬다.
그때,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황명이오! 무천왕부에서 사자가 오셨습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부러진 갈비뼈가 항의했지만, 무시했다.
누워서 소란을 들을 배짱은 없었다.
처소 마당에 들어선 건 백발의 노인이었다.
등이 곧고, 눈빛이 매서웠다.
걸음걸이 하나에도 절제된 위엄이 묻어났다.
무천왕부의 구장로, 무천왕의 최측근이자 오른팔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뒤로는 시종 둘이 붉은 함을 받쳐 들고 있었는데, 그 함의 광택만 봐도 대충 이 처소의 어떤 물건보다 비싼 물건이라는 게 짐작이 갔다.
“17황자를 뵙습니다.”
구장로가 형식적으로 예를 올렸다.
허리는 굽혔지만 눈빛은 전혀 굽혀지지 않았다.
그 눈빛이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고 지나갔다.
마치 값을 매기는 듯한 시선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무천왕 전하께서 하사하신 물건을 전하러 왔습니다.”
시종이 붉은 함을 열었다.
안에는 작은 옥합이 있었고, 그 안에서 은은한 향이 흘러나왔다.
향이라기보다는 뭔가 살아있는 기운이 새어나오는 느낌이었다.
“천령단입니다.”
[천령단이라 함은, 무맥이 없는 자에게 임시로 기운의 통로를 열어주는 영약입니다. 다만···]
목소리가 말을 흐렸다.
‘다만, 뭐.’
[영구적이지 않고, 게다가 그 대가로 평생 무천왕부에 예속되는 것이 관례입니다.]
‘예속이라는 게 정확히 뭔데.’
[문서상으로는 충성 서약, 실질적으로는 노예 계약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공짜가 어디 있겠어.
이 세계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라, 이런 뒷맛 남는 선물은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었다.
구장로가 온화한 척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너무 매끈해서 오히려 불쾌했다.
“무천왕 전하께서는 황자님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시어, 이 천령단을 하사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걸 복용하시면, 최소한 무사 흉내는 낼 수 있는 몸이 되실 겁니다.”
“조건이 있겠지요.”
내가 담담하게 물었다.
구장로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지만,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조건이 아니라, 예의입니다. 대신 파혼을 정식으로 발표해 주셔야 합니다. 7군주님과의 혼약은, 이제 황자님께 걸맞지 않습니다.”
아, 그러니까.
영약 하나 줄 테니 얌전히 물러나라는 거구나.
말은 예의니 배려니 하는데, 결국 요지는 하나였다.
꺼지라는 거다.
나는 웃었다.
갈비뼈가 아팠지만 웃음이 났다.
“싫습니다.”
연무장이 아니었는데도 정적이 흘렀다.
마당에 있던 시종들, 구장로의 얼굴, 심지어 왕 노인까지 나를 쳐다봤다.
바람에 잡초가 흔들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였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천령단,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장로의 얼굴이 붉어졌다.
손에 들린 함을 받쳐든 시종들도 서로 눈치를 교환했다.
“황자님, 이건 무천왕부의 배려입니다. 이걸 거절한다는 건, 앞으로 무맥을 얻을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부러진 갈비뼈 때문에 자세가 조금 구부러져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구장로의 손끝이 떨리고 있습니다. 당황한 겁니다.]
목소리가 알려줬다.
‘알아, 나도 보여.’
전생의 습관이 남아있는 걸까.
상대의 미세한 반응 하나하나가 눈에 걸렸다.
호흡의 속도, 시선의 방향, 손가락 관절의 긴장.
심지어 발끝이 살짝 뒤로 물러난 것까지 보였다.
이 몸은 무맥이 없어서 기운을 못 다루지만, 눈과 뇌는 여전히 예전 그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몸은 폐인인데 관찰력만큼은 전성기 그대로였다.
“배려는 감사히 받겠지만, 저는 제 방식대로 살아보려고 합니다.”
“···방식이라니. 폐인 신세에 무슨 방식이 있단 말입니까!”
구장로의 목소리가 커졌다.
인내심의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흔들리는 걸 보니, 이 노인도 나름 계획대로 안 풀려서 답답한 눈치였다.
“3개월 안에 유하린 군주를 황궁에서 쫓아내겠다고 이미 선언했습니다. 그것이 제 방식입니다.”
마당이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구장로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실소로 바뀌었다.
시종 하나는 참지 못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 소문이 벌써 여기까지 퍼졌군요. 미치셨습니까?”
“글쎄요, 미쳤는지 아닌지는 3개월 뒤에 확인하시면 됩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입가에 여전히 핏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그게 오히려 표정을 더 뻔뻔하게 만들어줬다.
연무장에서 얻은 상처가 이럴 때 쓰일 줄은 몰랐다.
구장로가 나를 오래 노려봤다.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내 안의 확신은 커졌다.
이 노인은 지금 나를 광인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 노인은 지금 머릿속으로 무천왕에게 뭐라고 보고할지 궁리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황자가 미쳤다고 하기엔, 눈빛이 너무 멀쩡했으니까.
“···좋습니다.”
구장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억지로 눌러 담은 짜증이 배어 있었다.
“천령단은 도로 가져가겠습니다. 대신, 무천왕 전하께 이 상황을 그대로 보고드릴 것입니다.”
“그러셔도 됩니다.”
그가 함을 닫고 돌아서며 마지막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황자님이 하신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등 뒤로 시종들이 붉은 함을 다시 챙기며 서둘러 뒤를 따랐다.
발걸음 소리가 마당을 벗어나 대문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지켜봤다.
구장로와 시종들이 마당을 빠져나가고,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벽에 등을 기댔다.
방금까지 유지하고 있던 뻔뻔한 표정이 스르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마마, 지금 뭘 하신 겁니까···”
왕 노인이 약재를 들고 오다가 그 장면을 목격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손에 든 약재 그릇이 흔들려 물이 조금 넘칠 정도였다.
“왕 노인, 저 방금 뭔가 재미있는 걸 놓친 것 같은데,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그, 그야 물론이지만···”
왕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약재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마당 쪽, 구장로가 사라진 대문 쪽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나를 봤다.
“마마께서는 이제, 황궁 전체의 웃음거리가 되거나, 아니면···”
“아니면?”
“···미친 도박꾼이 되실 겁니다.”
나는 웃음이 났다.
둘 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적어도 폐인으로 조용히 죽는 것보다는.
웃음거리든 도박꾼이든, 최소한 살아있다는 증거는 되니까.
“왕 노인, 국수 같은 거 없죠.”
“···예?”
“아뇨, 그냥. 갑자기 뭔가 먹고 싶어서요.”
왕 노인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표정을 보고 다시 웃었다.
갈비뼈가 시큰거렸지만, 웃는 걸 멈추지 않았다.
문제는, 구장로가 저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무천왕부 전체가 나를 주시하기 시작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천왕부만이 아니라는 것도, 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