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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정하늘과 김소연의 의심을 겨우 넘긴 뒤, 나는 결국 이 부탁을 제대로 해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면, 차라리 빨리 끝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밤새 이불 속에서 몇 번이나 되뇌었던 다짐이었는데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다시 속이 울렁거리는 걸 보면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게 분명했다. 그래도 해야 한다. 나는 한도현에게 접근할 자연스러운 기회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는데, 마침 다음 주에 있을 체육대회 준비 위원회가 눈에 들어왔다. 각 반에서 두 명씩 준비 위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자마자,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들었다. 담임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별말 없이 이름을 적었는데, 그 짧은 시선조차 나를 조금 위축되게 만들었다. 평소에 이런 일에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놀랍게도 한도현 역시 축구부 대표로서 자연스럽게 준비 위원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명단이 발표되던 순간, 나는 속으로 안도와 긴장이 동시에 차오르는 걸 느꼈다. 이건 하늘이 내려준 기회구나, 싶어서 나는 처음으로 이 상황에 약간의 기대감을 느꼈다. 하지만 문제는 준비 위원회 모임 자체가 순수하게 준비만 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그 자리에는 반마다 인기 많은 여학생들도 여럿이 참여했는데, 다들 은근슬쩍 한도현 근처에 자리를 잡으려 눈치싸움을 벌이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누구는 일찌감치 도착해 그의 옆자리에 가방을 던져두고, 누구는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에 슬쩍 끼어들어 자리를 바꿔치기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내가 얼마나 순진한 계획을 세웠던 건지 새삼 깨달았다. 첫 모임 날, 나는 회의실 구석 자리에 앉아 한도현이 앉을 자리를 눈여겨보았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순식간에 주변 자리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반 여학생인지도 모르는 애들이 그의 옆자리를 두고 은근한 신경전을 벌였고,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삭였다. 회의 안건은 체육대회 물품 목록과 반별 응원 구역 배정이었는데, 정작 그 내용에 집중하는 사람은 몇 없어 보였다. 다들 한도현의 표정, 그의 웃음, 그가 누구에게 시선을 주는지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으니까. 이래서야 내가 다가갈 틈도 없잖아. 결국 그날은 아무런 진전도 없이 회의만 끝났다. 나는 실망감을 안고 자리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회의실 밖 복도에서 혼자 서 있는 한도현과 마주쳤다. 다른 애들이 다 몰려나간 뒤, 그는 휴대폰을 보며 잠시 시간을 때우는 듯했는데, 나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다가갔다. 심장이 벌써부터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손끝이 살짝 떨려오는 걸 느끼며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 발목은 괜찮아졌어?" 말을 걸자 한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이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딘가 서늘했지만, 이번엔 곧 익숙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전환이 너무 매끄러워서, 나는 또다시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스위치를 켠 것처럼,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는 그 속도가 소름 끼치도록 자연스러웠다. "아, 괜찮아졌어. 신경 써줘서 고마워." 대답은 친절했지만, 어딘가 형식적인 느낌이 강했다. 마치 정해진 대본을 읽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그 어조에서 진심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는데, 그럼에도 대화를 끊을 수는 없었다. "체육대회 준비하는 거, 힘들지 않아?" 대화를 이어가려고 애쓰며 던진 질문에, 한도현은 짧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럭저럭. 근데 너 이름이 뭐였지?" 또다시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는 질문이었다. 이미 지난번에 소개했는데도 그는 마치 그 기억을 완전히 지운 듯한 태도였다. 나는 순간 뭔가 서운한 감정이 스쳤지만, 애써 담담하게 다시 대답했다. "강태윤이야." "아, 그래. 강태윤." 이름을 다시 확인하고도 그의 표정에는 별다른 관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눈동자가 잠깐 나를 향했다가, 곧 다시 휴대폰 화면으로 돌아가는 그 짧은 움직임 하나가 모든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무심함이 반복될수록, 나는 그가 정말로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는 순간이 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뭘로 채워져 있는 걸까. 그때 마침 복도 저편에서 여학생 무리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반 여자애들이었는데, 한도현을 발견하자마자 목소리 톤이 확 밝아지며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오빠, 여기 있었네요!" 순식간에 그를 둘러싼 무리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밀려나 버렸다. 한도현은 그들을 향해 능숙하게 웃음을 지으며 대화를 이어갔는데, 그 모습이 방금 나와 대화하던 무심한 표정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밝고, 여유롭고, 상대를 배려하는 듯한 그 표정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나는 그 순간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목소리의 높낮이까지 미묘하게 조정된 느낌이었는데, 여자애들 앞에서는 한 톤 높아지고 부드러워지는 반면, 나와 이야기할 때는 낮고 건조했다. 저게… 진짜 얼굴인가, 아니면 방금 그게 진짜였나. 혼란스러운 생각을 안고 나는 그 자리를 슬며시 벗어났다. 복도를 걸어가며 나는 계속 그 극명한 표정 차이를 곱씹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느낌이 들었다. 한도현은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얼굴을 꺼내 쓰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윤서아가 봐온 그 친절하고 밝은 모습도, 사실은 그저 수많은 가면 중 하나였을 뿐인 걸까. 그 생각이 들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윤서아는 지금 실체 없는 허상을 좋아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허상을 향해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 거였다. 이걸 계속해야 하는 걸까. 교실로 돌아가는 길, 나는 몇 번이나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복도 끝에서 여전히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인 한도현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는데, 그 소리가 마치 나에게만 다르게 들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답을 찾지 못한 채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방에 틀어박혀 이 상황을 어떻게 윤서아에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나는 우연히 SNS에서 한도현이 올린 게시물 아래 달린 댓글 하나를 보고 말았다. 다른 학교 여학생이 남긴 짧은 댓글이었는데, 그 내용이 어찌나 낯설고 소름 끼치던지, 나는 그 화면을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손끝이 떨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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